주말근무 반성
"토요일마다 출근을 해야 해요."
며칠 전 만난 후배 임원이 꺼낸 말이다. 순간 '언제 적 토요 근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재직 시절 토요일 근무를 숱하게 하긴 했다. 솔선수범한다는 의미도 있고, 간혹 회의를 통해 일이 진척되는 것도 있어서 아무 의심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바뀐 상사의 한마디로 모든 게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스탭들이 토요일에 나와서 무슨 일을 하는데?"
"엥? ........"
그러고 보니 그동안 토요일에 한 일이라고 뿌듯해했던 일들이란 게 별게 아닌 거다. 주중에 조금만 신경 쓰면 할 수도 있는 일을 굳이 토요일로 미뤄서 한 것에 불과했다. 고개가 떨궈진다.
그 후로 토요일은 온전히 개인 시간이 되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한 두 번 주말이 지나면서 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내와 집 앞 카페에서 커피와 브런치를 먹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거나, 교외로 드라이브 하며 일주일의 피로를 풀던 기억이 새롭다. 어느 순간 주말이 회의와 보고로 지친 몸과 영혼을 힐링시켜 주는 시간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회사에선 그렇게 고민해도 안 풀리던 일이, 편안한 일상 속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라 해결을 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거나, 답이 잘 안 나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럴 때 그 일로부터 한발 물러서 멈추었더니, 오히려 전혀 다른 곳에서 답을 발견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곤 한다. 산을 오를 때 중간중간 '쉼터'에서 다리를 쉬게 해 주는 게 정상까지 가는 길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경기가 반등할 기미를 안 보이니 기업들마다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그 대책의 일환으로 임원들이 토요일 근무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2004년부터 시행해 온 '주 5일 근무제'가 누군가에겐 남의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임원들에게 20년 전의 레트로 감성을 입히고 있는 것이다.
통상 임원의 주말 근무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긴장감 조성이 목적인 경우가 많다. 임원들이 주말에도 일하니 직원들에게도 열심히 하자고 분발을 촉구하려는 것이다. 당장은 회사 전체에 냉랭한 기운이 돌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하지만 이 분위기 또한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는 순간 충격요법은 효력을 다한다.
과거 나는 근태관리가 인사의 기본이라 여기고 직원들은 물론 임원의 근태까지 챙겼던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좋은 의도로 믿고 한 행동이었다. 임원의 과도한 근무시간을 억제해서 건강을 보호하고, 직원들의 근무시간이 늘어나는 근원을 막기 위함이라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의도는 의도일 뿐, 결과는 오히려 반대로 나타나곤 했다. 솔직히 그런 결과를 의도한 것이 진심이 아니었냐고 물어보면 완강히 부인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임원은 회사에서 고용안정성이 가장 취약한 계층이다. 인사의 의도를 좋게만 해석할 리가 만무하다. 진의를 추측하려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결국, 의도와 다르게 결과는 삼천포에 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저질렀던 그런 구태가 반복되며 오늘의 사태까지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993년 6월 삼성 이건희 회장은 7/4제를 들고 나온다. 7시에 출근해서 4시까지만 일하고, 퇴근 후에는 개인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자기 개발을 하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든 말이다.
지금 적용해도 놀랄 일인데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기도 전의 일이니 당시 얼마나 파격이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 제도는 2002년에 도입한 '자율 출퇴근제'에 자리를 물려주고 퇴장할 때까지 9년간 지속된다. 말로만 외친 게 아니었던 것이다.
7/4제가 폐지되던 해의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7/4제가 시행된 9년 동안 삼성 임직원들의 외국어 자격 취득은 2배 이상, 세계 1등 제품은 5개에서 16개로 늘었으며, 직원들은 여가시간을 얻었고 업무적으로도 보고절차 간소화, 회의문화 개선 등의 효과가 있었다.'
세월의 숫자를 되짚어보니 3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고 '자율 출퇴근제'가 도입된 지도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런데 지금 임원들은 '주말근무'를 외치며 썰렁한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살다 보면 가장 화가 나고 한심한 경우가 있다. 시간이 촉박해서 속이 타들어 갈 때이다. 그때마다 되뇌이게 되는 말이 있다. '미리 해 둘 걸.'이다. 공부도 그렇고 일도 그렇다. 회사 일도 여유를 가지고 임할 때 실수를 덜하고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쫓기고 다급하면 안 하던 실수까지 튀어나와 갈 길 바쁜 사람의 발목을 잡기 마련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주말엔 숨가쁜 일로부터 살짝 벗어나 몸과 마음에 '쉼의 미학'을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폴레옹은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책을 한 수레씩 가져간 것으로 유명한 독서광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그의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시간이기도 했겠지만, 전장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을 가다듬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으로 상상한다. 간간히 쉬는 여유 속에서 더 큰 지혜를 얻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이 시대 임원들에게
200년 전, 전쟁터 말안장 위에서 책을 읽는 나폴레옹이,
그리고 30년 전, 7/4제를 외친 이건희 회장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뭣이 중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