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마라
"성공적인 구단 운영 비법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로 구단을 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의사결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세계 여성 축구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미셸 강 구단주의 말이다. 마치 미다스의 손처럼 사들인 팀마다 최고의 성적을 내는 성공 비법에 대한 질문에 그녀의 답은 명쾌하고 주저함이 없다.
대기업에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중견기업에 스카우트되어 갔지만 단기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케이스를 심심치 않게 본다. 대부분 창업자와 같은 절대 권력자와 그 주변의 철옹성 같은 인의 장막에 가로막혀 자신의 경험과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뛰쳐나오는 경우다.
우수한 인재를 영입했으면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고 믿고 맡기는 것이 기본인데 이를 실천하는 리더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많은 경영자들이 인재를 영입하고도 그들이 내리는 결정에 간섭하거나, 자신의 결정없이는 실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능력 있는 인재들이 지닌 잠재력을 질식시킨다.
데려올 때는 삼고초려도 불사하지만 막상 조직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잡은 물고기 신세로 전락시킨다. 재능을 가진 인재라 해놓고는 자기 조직의 방식으로 밀어붙이고 적응하라고 하니 영입 인재들이 실망 속에 손을 들고 떠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이 조직은 영원히 좋은 사람을 모셔올 수 없고 기존 세력들의 아성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의 성은 더욱 공고해지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망하는 조직에서 벌어지는 소설 같은 얘기지만 실제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는 데서 아쉬움이 있다.
이런 현상은 왜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리더의 겸손함 부족이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성공한 리더일수록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최선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출중한 능력도 이전 조직에서 보여준 모습에 불과한 것이고, 내 조직에서는 내가 더 잘 안다'는 생각으로 무장이 되어 있으면 영입할 때의 생각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간섭이 일상화된다.
리더의 지나친 간섭은 조직을 복지부동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모든 일을 리더의 결정에 의존하다 보면 시간은 지체되고 곳곳의 유능한 인재들도 뜻대로 역량발휘를 못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일은 요원해지고 수동적인 조직으로 변해가다 결국 파고에 휩쓸려 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중국 수나라 양제는 요동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중국과 대립하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황제 즉위 후 동생의 반란을 겪은 양제는 황제 권력이 아직 불안정한 상태임을 실감하고 주변의 충성심을 믿지 못한다.
군사 귀족 세력과 그들이 거느린 군사력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요소로 생각하고 황제가 병부를 거치지 않고 각 부대의 대장군을 직접 통제할 수 있도록 지휘권을 강화하여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자신에게 물어서 결정하게 한다.
전권을 장악한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 시 황제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전술을 채택한다. 산동에서 출진한 수군함대에 군량을 맡기고 평양성에 도착한 육군이 함대로부터 군량을 보급받는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고구려 군은 시간이 갈수록 수나라 군대의 보급이 끊겨 식량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일부러 항복협상을 제안하며 시간을 끈다.
고구려가 협상을 들고 나오자 수나라 지휘부는 요동에 있는 수양제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결정을 받느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지연전술에 걸려들어 군량이 떨어진 수나라 군대는 지친 가운데 후퇴하다가 살수(청천강)에서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아 대군이 전멸하는 비극을 맞이한다.
이후에도 수양제는 한 차례 더 고구려 침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그 후유증으로 쇠락을 길을 걷다 마침내 나라 자체가 멸망하고 만다.
하지만 모든 리더가 다 이런 것은 아니다.
최근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는 만년 하위의 불명예를 뒤로 하고 12연승이라는 질주를 이어가며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년간 많은 투자와 팬들의 성원에도 실망감을 주던 팀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배경에 두 사람의 조화가 눈에 띈다.
김경문 감독은 투수코치로 '투수 조련사' 양상문을 영입한다. 양상문은 두 차례의 감독직과 단장까지 역임했던 사람이다. 한 부분만을 맡는 기술코치는 그의 격에 맞지 않는 자리였지만 양상문은 달려갔고 김경문은 그에게 한화 투수진 재건의 역할을 일임한다.
김경문 감독은 "양상문 코치의 말은 무조건 듣는다"라고 할 정도로 둘 간에는 두터운 신뢰가 작동한다. 그리고 리더가 신뢰한 인재는 남다른 투수진 운영전략을 실행하여 팀의 연승으로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데시와 라이언(Deci & Ryan, 1985)은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 인간은 외부의 통제가 없는 자율성을 인식할 때 더 큰 만족감과 동기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즉,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경영자나 리더가 부하에게 일을 위임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은 방임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 자극을 일으키는 핵심 전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리더의 진짜 역할은 모든 일을 다 알고 다 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곁에 두며, 그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데 있다.
탁월한 경영이란 내가 얼마나 똑똑한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을 알아보고, 그들을 존중하며, 자율적으로 일하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인재를 활용하는 원칙으로 삼았던 말이 있다.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의심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마라).
좋은 사람을 잘 골라 뽑고 그렇게 쓴 인물이면 믿고 맡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