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가까워지는 확실한 방법
유심칩을 바꿀 수 있다는 문자를 받고 대리점으로 향한다.
멀리서 보니 줄이 많이 서 있던 1시간 전과 달리 한산하다. '시간이 늦어 교체가 끝났나?' 하고 헛걸음을 한 것에 대한 불만이 묻어나려던 순간 매장 앞의 여직원이 하이 톤의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 준다.
기다림 없이 안내해 준 좌석에 앉는데 남자 직원의 표정과 말투가 친절하다. 하루 종일 반복된 일을 하느라 지쳤을 법도 한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칩 교체를 위해 휴대폰 커버를 벗기는 데 생각만큼 잘 안되는지 "잘못하면 부러지겠는데..." 하며 애를 쓴다. 어렵사리 커버를 벗겨 내려놓는데 '아뿔싸' 커버의 한쪽 모서리가 끊어진 게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정작 직원은 그걸 모르는 눈치다.
이때 옆에 앉은 아내가 내 다리를 툭 치며 나에게만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말한다.
"저거 얼마 안 비싸, 내가 사줄게".
약간 짜증이 올라올 즈음 아내의 말에 감정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있는데 직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폰을 돌려준다.
휴대폰을 받고 돌아서며 아내에게 부러진 곳을 손으로 가리켰더니 직원이 그 모습을 봤는지 그제서 "아, 거기 부러졌어요? 죄송해요 색이 같은 건 아니지만 이걸로 교체하시면 어떨까요? 하고 매장 안에 있는 커버를 건네준다.
나는 좀 뜨듯 미지근해하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아내가 "네. 그거 좋겠네요. 고마워요" 하며 밝은 얼굴로 "이걸로 바꿔 봐. 예쁘네" 하는 거다.
사실 나는 본래의 커버가 아닌 게 내심 불편했는데 더 이상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걸 포기하고 돌아왔다. 지금 PC 옆에 투명 커버가 씌워진 휴대폰이 놓여 있지만 아직까지 전의 것만큼 맘에 들지는 않는다.
아내와 나는 성격이 정반대다. 나는 늘 급하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흑백을 가리기를 원하며 부정적인 편이다. 스스로는 잘못된 지점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거라 강조하지만 아내는 내게 늘 "왜 그렇게 부정적이셔. 좋게 봐도 될 것 같은데..." 하며 놀린다. 그나마 아내 덕에 수그러 드는 게 다행일 따름이다.
이런 태도는 천성인지 오랜 사회생활 속에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심성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벌어진 일만 봐도 아직 긍정적으로 변하지 못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2년째 여름과 겨울에 아내와 둘이서 올레길을 걷기 위해 제주도를 찾는다. 오늘 일과 겹쳐져서 작년 말에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제주도에 도착한 둘째 날. 택시를 불러 올레길 5코스 출발지로 갔는데 막상 내려보니 올레길 시작점 표식인 '간새'가 없다. 올레길 출발지가 아니었다. 택시는 가 버렸고 어찌해야 하나 약간 당황해하고 있는데 "여기 와서 천혜향 드시고 가세요" 라며 농원 주인이 말을 건넨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저희가 5코스를 돌려고 남원포구라는 시작점을 찾아온 건데 여기가 아닌가요?"
"여기는 5코스 중간 지점이에요. 남원포구는 더 갔어야 하고 거기서 여기까지 한 시간 반정도 걸려요.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쇠소깍까지도 한 시간 반 걸리고요"
"아, 네. 저희가 잘못 내렸네요. 다시 큰길로 나가서 택시를 불러야겠어요" 했더니
"여기도 택시가 들어와요. 택시 부르고 기다리면서 천혜향 드세요."
택시 입력창에 다시 남원포구를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농원 주인이 어느새 천혜향을 까서 우리에게 건넨다.
"맛있네요. 서울 가서 주문하게 명함 좀 주세요" 했더니 명함이 두 가지라 한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 그리고 또 하나는 부인 이름의 명함이라 한다.
아내가 "그러면 사모님 걸로 주문할게요" 한다.
"집 사람 통장으로 돈이 들어가면 잘 안 나오는데..." 같이 웃음을 나누는 동안 택시가 들어온다.
바로 전 우리를 내려줬던 택시가 다시 콜을 받아 들어온 거다. 농원 사장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택시에 오른다.
"안 그래도 제가 이상해서 남원포구를 물어본 건데..." 택시 기사님이 먼저 말을 꺼낸다.
시시비비를 가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수긍했다. 분위기를 감지한 아내가 내게 말을 건넨다.
"농원을 되게 크게 하시네"
"그러게 말이야. 상당히 큰 것 같아"
순간 기사님이 끼어든다.
"농원이 크다는 건 힘들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 또 그런가요?" 했더니
"생각해 보세요. 저거 가꾸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데 값은 정해져 있지도 않고... 저도 집에 들어가서 귤만 보면 스트레스입니다"
그러고 보니 집들마다 마당에 귤나무가 한두 그루씩은 있다. 노란 귤이 우리 눈엔 예쁘고 언제든지 맛있게 따 먹을 수 있는 과일인 줄 알았는데 그 반대 논리를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두 번째 만나서인지 이후부터 기사님의 입이 쉬질 않는다. 결국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옮겨붙는다. '놀멍 쉬멍 보멍' 올레길을 걸으러 온 우리에겐 관심 밖의 주제이다. 기분 나쁘지 않게 화제를 돌려야 했다.
"오늘 날씨는 어떨 것 같으세요? 이쪽에는 비가 안 오겠죠?"
"제가 그걸 알면 택시 운전하고 있겠습니까? 제주도 날씨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 그렇군요. 하하"
원래 아침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30분을 더 보낸 후에야 출발지에 도착했다.
사람마다 세상과 상황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이 다르다.
우리 집도 아내는 초긍정의 화신인 반면 나와 아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 편이다. 우리는 그걸 문제점을 발견하는 눈이라 주장하지만 때론 나 자신도 피곤하긴 하다. 좋은 것도 부정의 눈으로 바라보면 한없이 화가 나고 비관적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행복해도 손톱 밑의 작은 가시 하나를 더 불행하게 느끼는 게 인간이라고 한 어느 철학자의 말이 틀리지 않다.
스포츠 중에 배구와 농구는 경기 도중 타임아웃을 불러 감독이 작전지시를 할 수 있다. 연속 실점을 하거나 분위기가 침체되는 기운이 느껴지면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은다. 방송 카메라는 감독의 입에서 나올 작전에 주목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감독들이 하는 얘기는 생각보다 사소하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왜 그래? 평소 하던 대로 해" 같은 식이다.
한때는 감독이 선수들에게 화를 내며 경기를 이끄는 모습도 있었다. 지금은 이런 모습이 거의 사라진 것으로 봐서 요즘 세대들에게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리더십이 대세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대단한 작전이나 전략보다도 실전에서 더 중요한 건 사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언어나 압박을 하기보다 안 좋은 분위기를 끊어주고 선수들이 심기일전하도록 돕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 중에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비판적이 되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날카로울수록 유능하게 볼 것 같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부하들을 향하는 경우라면, 사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할지 분위기를 해치는데 영향을 미칠지 고민해야 한다.
남원포구에서 두 시간 정도를 걸어서야 처음 내렸던 농원에 도달했다. 그리고 농원 앞을 지나며 사장님께 외친다.
"사장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농원 안에는 아침엔 보이지 않던 그의 아내가 천혜향이 가득 실린 수레를 밀고 있었다.
"아, 네. 천혜향 더 들고 가세요. 시원하게."
기분이 한껏 좋아진 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열 번에 한 번만이라도 부정적인 생각과 언어를 긍정적으로 바꿔보는 연습을 해보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또 한 번 반성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