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요 며칠 바쁘다는 핑계로 글 쓰는 일도 소홀해지고, 산에 오르는 것도 자주 하지 못했다.
게을러지는 나 자신을 다독여, 오늘은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단풍을 구경하러 멀리 갈 필요가 없다는 점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나의 뒷산, 몬트리올의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몽로얄(Mont-Royal)에서 나는 언제나 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수 있다.
자연은 매번 옷을 갈아입으며 그때그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노란빛이 가득한 놀이터 주변은 한적한 오후의 산책을 즐기는 가족들로 평온하다. 햇살이 노란 나뭇잎을 비추니, 마치 노란빛 조명이 켜진 듯 주변이 환하게 밝아진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찬란한 단풍의 색은 조금 가라앉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산책길 곳곳에는 바람과 비에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깔려 있고, 가을 나무들은 어느새 잎을 떨구어 나뭇가지들이 듬성듬성 비어 있다. 나무들은 마치 제 알몸을 드러낸 듯하다.
낙엽이 깔린 길을 걸으며 문득 떠오르는 시 한 구절, 학생 시절 '별밤'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오던 그 문장이 떠오른다.
"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밟는 소리가...'
소녀 시절의 감성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몬트리올의 풍경은 빌딩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나무에 자전거를 기대고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떠오른다. 사월의 목련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낭만도 좋겠지만, 가을 낙엽 아래서 그 편지를 읽는다면 더 쓸쓸하고, 그만큼 더 낭만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산으로 올라오는 길은 공사 중이라 조금 복잡해졌지만, 오늘은 낭만을 즐기기로 한 날이니 일부러 계단을 따라 돌아 내려가기로 했다.
내가 산에 오르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숲길을 걷는 것이 주는 평온함 때문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좋은 글감과 영감이 떠오르곤 한다.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나를 방해하는 것은 나뭇잎을 흔들어 떨어뜨리는 바람과, 나무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청솔모뿐이다. 숲길은 끊어질 듯 하다가도 다시 이어지며, 마치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나니아의 옷장처럼 느껴진다.
길가에 놓인 벤치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두세 명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참 다정하고 따뜻하다. 이미 낙엽을 다 떨구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보니, 가을 나무와 겨울 나무 중 어느 쪽이 더 낭만적일지 궁금해진다.
하산하는 길, 하늘 끝에 엷게 드리운 석양이 보인다. 이제 내리막길을 걸으며 들리는 것은 차박차박 울리는
내 발자국 소리뿐이다. 오늘은 혼자서 이 가을의 낭만을 한껏 느낀다.
너무 간지럽고 오글거려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참 좋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