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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기린 Mar 11. 2022

내 머릿속의 또다른 나

- 강박증

진료를 할 때 의사가 가장 먼저 살피는 것은 환자가 병원에 오게 된 이유이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보통 기분이 우울하다, 기억력이 떨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다, 술 문제가 있다 등의 내원 사유를 접하게 된다. 여기가 바로 진료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강박증은 이런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원 이유를 듣고 어?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한다면 높은 확률로, 강박증이다.


강박증 환자들이 호소하는 증상의 예를 들자면 ‘짝수가 두려워요’, ‘휴대전화 메신저를 확인할 수 없어요’, ‘과일에 방사능이 묻어 있을 것 같아서 무서워요’ 등이다. 나타나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핵심은 하나로 통한다. 무언가에 대한 비합리적인 걱정, 그리고 불안감을 없애기 위한 특정한 행동의 반복. 환자들은 자신의 생각이 스스로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는 것임을 느끼며 좌절한다. 내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을 불어넣는 또다른 내가 있는 느낌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한다.


짝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된 P씨는 36세의 남성이었다. 금속과 관련된 중견기업에 다니고 있으며 2년 전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한 것은 처음이었다. 증상이 시작된 것은 1년 정도 전부터였다. 한동안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스트레스가 심했고 그 무렵부터 조금씩 숫자에 대한 불편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고 P씨는 이야기했다.


시작은 엘리베이터였다. 짝수 층에서 문이 열리면 왠지 좋지 않은 기운이 밀려들어오는 것만 같아서 숨을 참았다. 어쩌다가 숨을 쉬게 되면 나쁜 기운을 없애기 위해 발을 홀수 번 굴러야 마음이 편해졌다. 조금 불편하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릴 적에 거리에서 보도 블록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걷던 놀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짝수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는 영역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제 전화를 받을 때 휴대전화 화면에 뜨는 전화번호 끝자리가 문제였다. 010-1234-1234처럼 짝수로 번호가 끝나는 사람에게 연락이 오면 어김없이 발을 굴러야 했고 연락처의 주인과 짝수가 자동으로 연결되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그렇게 회사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절반 정도가 ‘짝수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몰래 어딘가에서, 불편한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발을 굴러야 했다. 발을 구르는 것도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한 번, 세 번이면 마음이 편해지던 것이 이제는 31번씩 세 번을 굴러도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기분이 남았다.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발 구르는 횟수가 50번을 넘어선 뒤로는 전화를 받는 것도 두려웠다. 앞 차 번호판이 두려워 운전도 할 수 없었다.


아내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짝수만 보면 불편해져서 발을 굴러야 한다고, 그래서 일상생활을 못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면 도대체 누가 진지하게 들어주겠는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짝수 홀수가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고, 발을 구르는 것은 또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런 한심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을 괴롭히는 이 찜찜한 기분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했을 때는 이런 증상이 평생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한 상태였다.


가장 먼저 약물치료가 필요했다. 강박증은 쉽게 말해서 특정 뇌 영역의 과도한 활성화로 인해 생기는 질병이다. 약물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조절해 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P씨에게 내가 설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지금은 증상의 원인이 되는 머릿속 특정 부분이 너무 뜨겁게 활동을 하고 있어서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약물치료를 통해서 먼저 이 부분을 식혀야 합니다. 그런 후에 훈련을 진행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P씨의 뇌는 짝수가 불편하고 발을 구르면 편안해진다는 것을 학습했을 것입니다. 약물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증상을 견딜 수 있게 되면 그 때부터는 역으로 발을 구르지 않아도, 짝수를 보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P씨의 뇌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쉬운 것부터 해 나가겠습니다.”


보름 정도 고용량 약물치료를 진행하며 P씨는 증상은 남아있었지만 발을 구르는 횟수도 줄었고 짝수를 보았을 때 느끼는 불편함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 뒤부터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가서 짝수 층에서 호흡을 시키고, 짝수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받게 했다. 그러는 동안 발을 구르지 않는 것이 훈련의 핵심이었다. P씨는 당연히 힘들어했지만 조금씩 호전되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스스로 다음 목표를 정해 훈련을 하기 시작했고 증상은 빠르게 좋아졌다. 퇴원을 할 무렵에는 ‘짝수 사람’인 직장 동료의 병문안도 그럭저럭 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은 약물 용량도 상당히 많이 줄었고, 생활에 거의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신과적 질환은 질병의 증상이 대체로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병이라는 것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주변 사람이 느끼는 것은 ‘이 사람이 평소와 다른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정도가 대부분이고 병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과적 문제로 인해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뿐, 아픈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위로와 이해를 받기 어렵다. 진료 경험이 쌓일수록, 진료실 바깥에는 치료받았다면 겪지 않을 수 있었을 어려움들이 더 많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나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넘어 정신건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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