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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기린 Jun 18. 2022

진료 중, 정신과 의사의 머릿속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시험을 보는 것과 같다. 의사는 환자의 답변을 바탕으로 수많은 기존 지식을 조합하고 분석한다. 질문은 신중해야 한다. 단어 선택에 따라서 환자의 대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잘못 던진 질문은 진료의 방향을 완전히 비틀어 버릴 수 있다. 환자의 표정, 몸짓, 말투, 목소리 크기, 모든 곳에 문제 해결의 단서가 숨어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답을 내어 진단과 처방을 한다. 환자가 다음 번에 다시 내원할 때, 나는 내가 작성한 답안이 맞았는지 확인하는 수험생이 기분이 되곤 한다.


얼마 전, 이런 긴장과 짜릿함을 함께 느꼈다. 그 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한다.


오전 10시쯤 20대 초중반의 남자 환자가 내원했다. 병원에 온 이유는 기분이 우울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키가 컸고 덩치가 있어서인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 표정과 걸음걸이에서 특별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우울한 기분, 집중력 저하를 들었을 때 20대 중반의 남성에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첫 번째로 우울증, 조울증 등의 기분 장애이다. 다음으로는 ADHD 가 있었으나 치료받지 않은 상태로 지내왔을 수 있다. 최근 생활 스트레스가 많아서 일시적으로 겪는 증상일 수도 있다. 이성친구와 헤어진 뒤 발생한 우울한 기분이 지속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도 꼭 물어야 한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 알코올 문제가 있어서 이것이 기분, 집중력, 의욕의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마를 비롯한 물질 사용 장애도 심심치 않게 있다.


증상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의 첫 질문은 우울감, 집중력 저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환자는 2-3년 전부터 증상이 지속되어 왔다고 답한다. 특별한 악화 요인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단 최근의 스트레스로 인한 문제일 가능성은 낮다. 치료받지 않은 ADHD일 가능성도 떨어진다. 성장 과정, 가족 관계, 최근 생활에 대한 병력을 청취하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다. 성격적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정신과적 가족력도 없다. 증상이 시작될 무렵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몇 년 전에 받은 건강 검진에서도 큰 문제가 없었다.


술은 적당량, 담배는 거의 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대마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시 유병률을 고려할 때 기분 장애일 가능성이 높다. 이전에 비슷한 증상을 경험한 적이 있었는지, 현재 증상이 매일같이 지속되고 있는지 등을 묻는다. 정말로 2-3년 전부터 증상이 지속되었다면 전형적인 우울증, 조울증일 가능성이 낮기는 하지만 환자가 말하는 증상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기분이 괜찮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애매한 대답이 돌아온다. 이전에 비슷한 증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진료를 시작한 지 벌써 20분이 넘어가고 있지만 갈피가 잘 잡히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진단도, 처방도 묘연하다.


증상에 대해 더 묻기로 한다. 신체 질환과의 감별도 필요하다. 내분비계 질환이 있었다면 더위, 추위를 많이 타거나 최근 체중 변화가 동반되었을 터이다. 신경학적 증상 역시 없었다. 식욕에도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수면의 경우 잠을 자도 피곤하다고 한다. 성욕 저하가 조금 있었지만 주의할 만한 정도는 아닌 듯싶었다. 하루 일과에 대해 물었으나 역시 특별한 사항은 없었다. 비교적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었고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취미생활은 게임,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을 만큼 하고 있었다. 물어볼 것은 이제 거의 다 물어보았다. 환자도 따로 더 해줄 이야기는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 청취한 병력에 따르면 기분 장애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 소량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경과를 관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진료가 길어지는 바람에, 다음 환자가 이미 15분 이상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서 마무리지어야 한다.


진료를 마치고 환자가 나가는데,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몸집이 내가 처음 보았던 것보다 더 크다.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를 불러서 키와 몸무게를 묻는다. 1미터 83센티미터에 110킬로그람. 머릿속이 번쩍 한다. 환자를 다시 앉히고는 잘 때 코를 고는지 묻는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환자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한다. 수면 중에 호흡을 멈추는 바람에 룸메이트가 깨운 적도 있었다. 이제 모든 계획이 수정된다. 음주를 줄일 것을 교육하고 체중 감량이 가장 중요한 치료가 된다고 강조한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수면다원검사를 다른 병원에 의뢰한다. 이것은 정답이 틀림없다. 하마터면 엉뚱한 답을 적을 뻔 했다.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직전에 나는 답안을 고치는 데 성공했다.


의사로서 경험을 쌓는다는 것은 실력이 늘고 환자와 함께하는 법을 배우는 것뿐 아니라 매 순간의 긴장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 끊임없이 공부하고 반성하는 것, 스스로에 대한 적절한 확신을 가지고 진료에 임하는 것 등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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