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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기린 Aug 13. 2022

제 피부 속에 벌레가 살고 있어요

팔다리에 상처가 가득한 30대 남성이 병원에 왔다면 어느 진료과로 가야 할까? 다른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한 번 상상을 해 보자.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딱 자기 전공에 맞는 대답을 한다. 정형외과 친구는 외상이 아니냐고 한다. 피부과 친구는 아토피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정신과를 전공한 나는, 자해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원인에 따라 어느 과에서 진료를 보아야 하는지가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진료과가 항상 이렇게 쉽고 확실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다. 둘 이상의 전공이 협력 진료를 해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당뇨 합병증으로 피부 문제가 있을 때는 내과와 피부과의 협진이 필요하다. 진료과의 영역이 겹치기도 한다. 치매는 신경과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진료한다. 척추 질환은 정형외과, 신경외과, 재활의학과의 공통 영역이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환자가 진료받기를 원하는 과와 의사가 생각하기에 환자에게 필요한 진료과가 전혀 달라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들이 있다.


30대의 남성 K 씨가 피부 문제가 있어 처음 찾은 의사는 당연히 피부과 의사였다. 4-5개월 전부터 시작된 문제였다. K 씨는 당시에 동남아시아 여행 중이었는데 노점에서 조금 덜 익은 돼지고기 요리를 먹고 나서부터 피부 문제가 시작된 것으로 기억했다. 일 주일 정도를 복통과 설사로 고생했고 그 뒤부터 가려움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K 씨를 진료한 의사는 피부에서 특별한 병변을 찾을 수 없었다. 음식 알레르기 때문에 피부 가려움증이 생길 수는 있지만 이렇게 병변을 전혀 동반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증상 조절을 위해 항히스타민제를 비롯한 약물을 처방하고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K 씨는 아무래도 돼지고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며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약을 복용하고 두어 달을 더 기다렸지만 증상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K 씨는 다른 피부과를 찾았다. 이제 K 씨의 이야기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해 있었다. 동남아 여행 중에 덜 익은 돼지고기를 먹었고 이후로 기생충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피부 밑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려움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피부 속에 기생충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렵도록 끔찍했다. 벌레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질 때면 손으로 긁고, 피부를 뜯고, 일단은 터뜨려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세게 누르거나 때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벌레는 쉽게 죽지 않았다. K 씨는 횡설수설하면서, 의사에게 제발 이 벌레를 없애 달라고 말했다. 의사는 K 씨가 짚은 부위들을 꼼꼼하게 살폈지만 정상 피부와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수많은 가능한 경우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렇게 병변을 전혀 남기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는 원인을 찾기 어렵겠다며 의사는 보다 큰 규모의 병원에서 진료받을 것을 권했다.


세 번째로, 대학병원 피부과에 갈 무렵에는 K 씨의 손과 발, 팔과 다리에 온통 뜯은 상처가 가득했다. 벌레가 알을 낳고 번식을 하는 것인지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몸 안에 벌레가 살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불쾌감, 두려움에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과 비슷한 경우가 있는지 인터넷을 찾고 또 찾았다. 벌레를 파내기 위해 점점 더 뾰족한 도구들이 등장했다. K 씨는 벌레가 움직이며 피부가 꿈틀거릴 때의 동영상을 찍어서 의사에게 보여주었다.


동영상을 본 의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영상에서 아무런 문제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K 씨를 진료한 두 명의 피부과 전문의가 뚜렷한 소견을 내지 못한, 아니 내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의사가 큰 병원을 권한 것은, 보다 많은 장비를 갖춘 곳에서는 원인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문제가 피부과에서 진료하는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피부과적으로 K 씨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세 번째 의사는 K 씨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K 씨는 벌컥 화를 냈다. 실력 없는 의사들이, 진단을 해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몰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병원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믿을 만하고 실력 있는 피부과 의사를 찾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이런 중에도 증상은 계속해서 심해졌다. 벌레는 이제 피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긁고 뜯어도 소용없었다. 면도날을 이용해 살점을 도려내 보기도 했지만 벌레를 없앨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 번째의 의사를 다시 찾아갔다.


의사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다시 권했다. 비아그라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는 심혈관계 약물로 사용할 목적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눈에 띄어서 성 기능 개선에 사용되고 있지 않느냐는 비유를 들며, 정신과에서 사용하는 약물이 일차적으로는 정신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되고 있지만 피부에 기생하는 벌레의 활동을 억제하는 부수적인 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K 씨는 반신반의했지만 이제 정신과가 아니라 어디라도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의 설명에도 나름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렇게 K 씨는 긴 여정을 거쳐서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하게 되었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물을 복용하며 K 씨는 기생충의 공포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피부과 의사의 설명 덕분에 치료는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3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는 K 씨는 피부 밑에 벌레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거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정신과에서 치료가 가장 어려운 질환을 꼽는다면 개인적으로 망상 장애를 상위권에 올리고 싶다. 망상에 대한 약물 반응이 뚜렷하지 않다거나 재발을 잘 한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망상의 치료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망상을 가진 사람들이 애초에 정신건강의학과를 잘 방문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들은 자신이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병원에 내원하지 않는다. 병원에 오지 않기 때문에 치료의 기회를 잡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환자들에게 망상은 생생한 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사실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환각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특히 망상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것은 모욕적으로까지 느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망상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은,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드물게 온 치료 기회를 걷어차 버리는 것과 같다. 망상의 진실 여부에 대한 논쟁보다는 환자들이 망상으로 인해 겪고 있는 고통을 치료를 통해서 경감시킬 수 있음을 설명하고 치료 기회를 확보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신과에서 망상 장애의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은 비정상적인 인식의 바탕이 되는 뇌 내 이상을 바로잡는 약물이며, 기생충의 활동을 억제하는 기능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적어도 K 씨에게 이 약물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피부 속 기생충의 활동이 줄어들었다는 느낌을 주었으니 기생충 치료 효과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환자의 감정적 어려움을 자극하지 않고 치료 기회로 연결한 피부과 선생님의 마음씀에 감사했다.


약물치료의 효과는 생물학적인 기전에 따라 이루어진다. 의학의 근본은 과학적 연구에 있다. 그러나 치료 과정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되새긴다.


* 이 글은 피부과 전문의 2인의 검토를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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