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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의 연금술사 Jul 24. 2022

R1 신고식

승무원은 비행 전 브리핑에서 각자의 포지션을 배정받는다. 비행기 내의 출입구 문 주변을 살펴보면, 벽에 접이식 의자가 붙어있는데 그 의자의 위치로 포지션을 부른다. 


각기 포지션에 따른 역할과 필요한 역량이 달라지기에 슈퍼바이저들은 크루들의 사번과 비행 경력을 토대로 포지션을 배정하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시니어 크루에게 배정되는 포지션은 R1(오른쪽 1번)이다.


R1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주어지는데, 첫째는 비행기 내에 ‘갤리’라고 불리는 간이부엌을 담당하는 갤리 매니저로서, 다른 크루들이 기내 서비스를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게 준비하는 역할이다. 참고로 프리미엄 클래스는 제공되는 식음료의 메뉴가 다양하고, 서빙 전에 음식을 직접 플레이팅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갤리 일을 하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두 번째는 기장실 체크이다. 비행기의 안전운행을 위하여, R1은 비행 내내 30분마다 기장실에 별일은 없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갤리 일도 아직 어렵게 느껴지는 나에게, 수많은 메뉴에 맞춰 필요한 그릇을 찾아 빠른 속도로 플레이팅을 하면서도 매 30분 텀을 놓치지 않고 기장실을 체크하는 R1 시니어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15시간짜리 장거리 미국 비행에서 나에게 R1이라는 포지션이 배정됐다. 

와우. 프리미엄에서 갤리 딱 2번 해봤는데. 3번째에 R1이라니...




일단 비행 시작 전 기장실에 가서 기장님과 부기장님께 인사를 했다.

“제가 오늘 R1이 처음입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기장님은 래퍼와 같은 속도로 커피 주문을 쏟아내셨다.

“아. 그래요??? 그러면 나는 커피 한 잔!! 더블샷으로 브라운 슈가 1개 넣고!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세 번 저어서 가져다줘요!!!!! 아니다!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세 번!!! 꼭 이렇게 만들어야 해요!! 알았죠??? ㅎㅎㅎ”


나와 같이 기장실에 들어간 사무장님은 웃음이 터지셨는지 마구 웃으셨고 나도 멋쩍게 따라 웃었다.




잠시 뒤 기장님이 나를 부르셨고, 나에게 정말 진지하게 물어보셨다.

“근데 말이에요, 사무장님은 그 열쇠를 찾았나?”

“네??? 무슨 열쇠요?”

“아, 그 비행기 엔진 키를 찾고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아까 사무장님한테 찾아보라고 했는데, 아직도 못 찾았나?”

“아...? 제가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한번 물어보고 알려줘요. 아주 중요한 거야. ”


손님들은 비행기에 탑승하기 시작했고, 부엌일도 채 끝내지 못했던 나는 부리나케 사무장님을 찾아갔다.


“사무장님! 사무장님! 기장님께서 비행기 엔진 키 찾았냐고 여쭤보시는데요?”

“잉? 무슨 키?”

“비행기 엔진 키요. 사무장님께서 알고 계실 거라는데요? ”

“푸하하하하하. 아깐 부기장님이 놀리시더니 이젠 기장님 차례시구나. 너 오늘 R1 처음이라고 두 분이 작정하고 놀리시네. 푸하하하. 비행기 엔진 키 같은 건 없어. 푸하하하하하하. 걱정하지 마.”


악... 당했다.


체크해야 하는 부엌일도 다 못 끝냈고, 처음 하는 포지션이라서 잔뜩 긴장도 한 상태였는데, 부기장님에 이어 이번에 기장님께서 신고식을 치르게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 같지만, 나는 워낙 긴장한 상태였고, 기장님이 진지하게 말씀하시길래, 진짜인 줄 알았다. ㅠㅡㅠ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시작된 나의 첫 R1 포지션은 친절하신 사무장님과 배려심 많은 동료 크루들 덕에 무사히 종료되었고, 덕분에 정말 많이 배웠고, 한 걸음 더 성장했다.


아직도 서툴기만 한 프리미엄 새내기의 길에 매번 귀한 인연들이 함께해서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부디 앞으로도 무사히 잘 적응할 수 있기를. 

다음번 R1 에는 더욱 잘 해내기를.

그리고 크루들에게 받았던 도움을 잊지 말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29

*다음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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