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소녀의 이야기로 위로받다
지희가 중학생이 되어가는 6학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지희는 새벽송을 올 교회의 중고등부 언니오빠들을 주기 위해 엄마와 과자를 사놓고 라디오를 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 성도들의 집을 집집마다 도느라고 오래걸린 언니오빠들의 방문을 기다리다 두 동생은 잠이 들었다.
엄마의 미용실 앞에서 듣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은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오가지않는 새벽 시간의 한적한 시장 골목에서 울려퍼지는 캐롤은 공간과 음악이 서로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엄마와 교회 언니 오빠들의 성탄 노래를 듣고 난 지희는 방에 누워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도 여전히 크리스마스 캐롤들이 흘러나왔다.
라디오를 들으며 지희는 빨강머리 앤을 읽는다.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 여성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소설로 빨간 머리의 고아 소녀가 나이 많은 미혼 남매의 집에 실수로 입양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토대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설이다. 동명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었다. 지희가 빨간머리앤을 처음 본 것은 고모네집에서 였다. 큰고모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안 좋아해서 지희에게 거의 보여주지 않았지만 왠일인지 빨간머리 앤은 보여주었다.
지희는 늘 자신의 삶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빨강머리 앤을 보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지희가 처음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는 엄마를 보러오지 않았다.전쟁 전에 딸을 둘 낳고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외할머니는 엄마를 낳게 되어 딸을 낳아 고개를 들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외할머니의 막내 딸인 엄마가 첫 아이를 딸을 낳았을 때 외할머니는 엄마를 보러, 아니 지희를 보러 오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는 산후조리를 해 줄 사람이 없어 고생해야 했다. 늦은 나이에 첫 아이를 출산하고 젖몸살이 나서 고생한 엄마. 노총각인 아빠가 아빠가 되어 하루종일 갓 태어난 지희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좋을 지를 몰라하며 아기를 보았다는 이야기. 젖몸살이 난 엄마의 사정도 모르고 큰 소리로 배고프다고 울어댔다던 지희의 이야기. 지희가 태어나던 당시는 엄마에게 힘들고 고되었던 때였기 때문에 엄마가 그 때를 이야기할 때는 꼭 고생스러웠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자신의 태어난 때의 이야기를 좋지 않게 듣는 지희로서는 마음이 슬펐다.
빨간머리 앤이 부모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집을 전전하는 장면을 볼 때 지희는 앤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지희의 탄생이 외할머니에게는 수치심으로, 엄마에게는 낯섬으로, 아빠에게는 어리둥절함으로 이어지는 그 서사가 지희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앤도 그러했듯 지희는 자기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지희는 외할머니와 단 둘이 있었던 적이 있다. 지희 엄마가 고모네에 아이를 맡기지 못해 지희를 외할머니네 맡겼다. 외할머니네 역시 지희같은 아이를 맡아줄 만큼의 장난감이나 좋은 것들이 존재하지 못했다. 지희는 외할머니 집에서는 짧게 지냈기 때문에 큰 마음의 구멍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되려 할머니를 용서하게 되었달까.
어느 일요일. 할머니를 따라간 어느 성당에서 할머니는 하얀색 레이스로 된 면사포 같은 것을 쓰고 기도를 했다. 어린 지희의 눈으로는 너무 아름다워서 지희는 교회가 아닌 성당에 다니고 싶어할 정도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할머니는 무슨 기도를 하는지 성당에서 길게 기도를 했고, 밤에는 지희를 데리고 옆집 할머니네로 늘 마실을 갔다. 할머니들이 지희에게 밥을 먹이고 간식을 먹이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지희는 두런 두런 이야기하는 할머니들 이야기를 자장자로 삼으며 잠이 들었다. 그러면 잠이 든 지희를 등에 업고 할머니의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 할머니도 조용하고 말이 없었지만 그저 그런 할머니가 지희는 좋았다. 지희가 일곱살 때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지희와 할머니와의 짧은 기억은 그렇게 남았다.
앤이 자신을 키워준 아주머니들을 이야기할 때 그 분들이 잘해주려고 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장면에서는 지희는 자신을 생각했다. 고모들을 생각했고 엄마아빠를 생각했다. 외할머니를 생각했다.
“ 아, 그분들은 저한테 잘해주려고 했어요. 될 수 있는대로 잘해주려고 했다는 걸 알아요… 그분들은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많았어요… 저한테 잘해 주려고 했다고 믿어요“ (빨강머리앤, 63쪽 발췌)
나이든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와 한 소녀가 같이 사는 특이한 구성의 가정이 지희와도 오묘하게 닮아있었다. 초록색 지붕 집이 마치 지희가 있던 고모네 집 같기도 하고 엄하고 표현이 투박한 마릴라는 고모같았다. 앤에게 따뜻하게 마음을 표현하려는 마릴라는 엄마같기도 했다. 말없고 수줍음이 많은 매튜 아저씨는 아빠 같기도 하고 때로 할아버지같기도 했다. 물론 매튜아저씨는 앤을 엄청 사랑하고 아저씨만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한 데 비해 아빠나 할아버지는 그렇지 못했지만.
책으로 앤을 읽을 때는 TV만화로 볼 때보다 더 지희의 마음을 울렸고 지희가 기분이 나쁘거나 마음이 슬플 때 지희는 빨강머리 앤을 읽었다.
앤이 좋아했던 스테이시 선생님은 4학년 때 선생님처럼 상냥하고 아름다웠고 지희도 앤만큼이나 책을 사랑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 외로운 삶을 살았던 앤이 자신의 삶을 특유의 긍정적인 모습으로 이겨냈던 이 소설은 태어날 때부터 외로움과 친구가 되어야했던 작은 아이 지희가 청소년이 될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특히 도시의 비좁은 골목 작은 그 틈에서 살았던 지희에게는 캐나다의 자연속에서 살아간 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감수성을 심어주는 좋은 씨앗이 되었다.
빨간 머리앤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끝이 난다.
“퀸스에서 돌아온 다음 날 밤 그 창가에 앉던 이후로 앤의 시야는 좁아졌다. 하지만 앤은 자기 발 앞에 놓인 길이 좁다고 해도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꽃이 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다.
‘하느님은 천국에 계시고 세상은 공평하도다.’
(빨강머리앤, 시공주니어 발췌)
며칠 전 지희는 비틀즈의 yesterday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제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구나.
노래의 처연함과 노래 가사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자아내는 멜로디가 지희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앞으로의 지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지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희는 책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한.
라디오가 있고 음악이 있는 한은
이 시장 골목에서 보이지 않는 아이가 아닌
초록색 지붕집의 앤처럼 자신의 일상을
아름다움으로 그려내는 그런 사람이 되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