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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슬기 Oct 19. 2024

깊고 깊은 언덕에서(2)

할아버지의 이야기  

양귀자의 단편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1970-80년대에 부천을 살아낸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멀고도 아름다운 마을'을 뜻하는 원미동이란 이름은 비대해진 서울에서 추방 당해 그 변두리에 도달한 은혜네의 비참한 삶을 반어적으로 드러낸다. (도서관 산책자, 111쪽)




깊고 깊은 언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천의 심곡동.

엄마가 있는 인천 신기촌시장과는 아주 멀리 깊고 깊은 언덕 속에 숨겨진 기분이 든다. 고모네에 맡겨진 지희가 언제쯤 엄마에게 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엄마한테 갈 수 있는지 아주 어린 지희는 가늠이 되질 않았다.


부천 심곡동의 양옥집 마당에서 심심해지면 작은 고모가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작은 고모는 쉼 없이 일했다. 일하지 않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쉼없이. 큰 고모의 쥐꼬리만한 군인 연금으로 세 식구 아니 지희까지 있었던 기간에는 네 식구가 생활하는데 큰 몫은 작은 고모가 많았다. 작은 고모의 살림솜씨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생활들.


고모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다 할아버지와 여자들 방의 요강을 비우고 청소를 한다. 마당을 쓰는 비질 소리에 아침에 눈을 뜬 지희는 부엌으로 간다. 할아버지가 일어나서 간간히 내는 소리. 큰 고모가 움직이는 소리들. 그 소리와 함께 바람소리 정도만 나는 아주 조용한 시간들.


고모는 석유 곤로에 국을 올리고 연탄 위 아궁이에 밥을 올려짓는다. 야채를 씻고, 다듬고, 썰고, 양념을 하고 나물을 무친다. 김에 참기름을 가로와 세로로 바르고 소금을 치고 다시 새 김을 얹어서 맛있게 김에 기름이 배이면 곤로에 불을 부치고 김을 굽는다. 김이 살짝 구워지도록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마치 놀이를 하듯이 즐겁다. 맛있게 구워진 김을 허겁지겁 먹는 지희의 모습을 보곤 고모들이 '지희가 저렇게 김을 좋아하니 지희는 김가게 사장님네로 시집 보내야지'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농담이라고는 전혀 어울리는 이 집에 지희의 식탐은 간간히 어른들을 웃기던 일상.

   

지희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은 달걀부침이다. 고모는 달걀을 흰 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서 섞는다. 분리한 흰자와 노른자를 각각 팬에 부쳐내어 마름모 모양으로 아이 입에 맞게 자른다. 칼로 달걀 지단을 예쁘고 정갈하게 잘라내는 것을 한참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흰 색 마름모와 노란색이 정갈하게 놓여있는 접시와 미역국, 김치, 동치미가 다같이 있는 밥상은 흰색, 노란색, 남색, 빨간색이 잘 섞여있는 그림과 같다.


 지희가 마당에서 놀고 있을 때 고모는 "지희야."하고 부른다. 고모는 건빵 튀김을 내놓는다. 언덕 밑 슈퍼에서 사온 건빵을 기름에 튀겨서 바삭바삭하게 만든 다음 설탕에 묻혀서 만든 간식. 때로는 다시마를 튀겨 내서 설탕에 묻혀주기도 하고 송편을 만들어먹거나 만두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떡을 만들 때는 쌀을 불려서 방앗간에 가서 쌀을 빻아온다. 방앗간 기계에 쌀을 넣으면 쌀이 빻아지면서 미끄럼틀 타듯이 내려오는데 방앗간 아저씨가 쌀가루를 넣고 또 넣어 아주 고운 가루가 될때까지 빻는다. 방앗간에는 깨를 볶으러가거나 볶을 깨를 짜서 참기름병에 담아내러 갈 때도 간다. 방앗간에서 쌀을 빻을 동안 뻥튀기를 먹거나 방앗간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노는 지희.  


아침에 일어나서 지희를 씻기고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다가 이부자리를 펴고 할아버지 누우실 자리를 만들때까지 고모는 쉬지 않고 일했고 그 집을 돌아가게 하는 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할아버지는 거의 말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할아버지는 이부자리를 걷고 체조를 한다. 할아버지는 교회를 가거나 화장실을 갈 때 외에는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밖을 잘 나가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건강한 이유는 체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괘 오랜 시간 동안 맨손 체조를 한다. 지희는 늘 아침에 일어나서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할아버지는 반갑게 아침인사를 한다거나 아이를 안아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 "잘 잤니." 단답형의 짧은 대답.

그저 체조를 하다가 아이가 오면 아이가 관찰하기 편하라는 듯이 천천히 동작을 한다. 아이가 할아버지를 따라하면 할아버지는 그저 눈길을 주며 아이와 같이 방에서 체조를 한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던 때에 태어나 빼앗긴 나라에서 그 시절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중년으로 넘어가던 시절을 전쟁을 겪어낸 할아버지.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라는 노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그가 그 노래에  담긴 그 가사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만 당연한 것이었을 수 있다.


부끄러움. 그가 가져갈 마음.


막내 아들이 세 살 때 떠난 전 처. 처의 아이들은 거의 뿔뿔이 흩어지고 아이들은 거친 삶을 살았고 믿거라 맞이한 새 아내와 그녀의 식구들은 그의 재산을 야금야금 팔아치우고  그는 맨 몸이 되었다. 혼자 된 딸에게 자신을 의탁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은 당신의 딸이 내어준 그 지붕 밑에 들어가 그저 늙은 몸을 의탁하는 것 뿐. 그의 몸이 최대한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과거의 그의 부끄러운 선택들이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랬다.


딸 아이가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자기 자신을 믿던 그가, 자기 자신이 만들었던 성을 내려놓고 그의 고집과 자만을 내려놓고 딸 아이를 따라서 교회를 갔다.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이 노래가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빼앗긴 나라에서 어떻게든 구차하게라도 살아보려던 그. 전쟁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그.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는 나라에서, 자신의 고집만 믿다가 맨 몸이 된 그에게 노래는 '하늘의 영광'을 이야기했다. 노래에 기대서 부끄러움을 내려놓기로 했다. 꼬마 손녀와 같이 매일 보는 예배시간에도 그는 태산을 넘었고 험곡을 지났던 자신의 세월을 넘고 넘어 하늘로 하늘로 가고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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