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언니가 되어 오늘 첫 출근을 했던 딸아이가 예상대로 씩씩하게 유치원 차량에서 내렸다. 같은 동 라인의 다섯 살 쌍둥이 동생들과 함께 내리니, 제법 언니 포스도 느껴지는 것 같아 괜스레 더 대견스러워 보였다. 그건 그런데 오늘은 새로이 같은 반이 된 친구들과 인사하는 날로, 큰 활동이 없었을 것을 아는데 반짝이던 아침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아주 꾀죄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런 아이를 오늘따라 집에 오자마자 씻겨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가방을 내리자마자 씻길 준비부터 했다. 따뜻한 물을 틀어 향기로운 워시로 '뽀드득'하게 씻겨 놓으니 그새 아이의 얼굴이 반짝인다. 물 묻은 아이의 몸과 머리카락을 큰 타월로 빠르게 닦인 후, 머리엔 작은 타월 하나를 둘러서 감싸놓고, 작고 앙증맞은 몸엔 바디로션을 듬뿍 발라준다. 그리곤, 아직 로션이 채 흡수되기도 전이라 옷을 입히기엔 좀 불편한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화장실 안에서 바로 옷을 입혀 나온다.
그렇게 아이를 씻기고 머리카락까지 꼼꼼히 다 말리는 동안, 잠시라도 느끼게 되는 한기에 혹여 감기라도 들세라 내 손놀림은 더 부지런해진다.
올해 겨우 6살이 된 딸아이는 11월생이라 그런지, 아님 둘째라 그런 것인지 내겐 여전히 어린이집을 다니던 그 네살 아이처럼 작고 쪼꼬맣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 딸이 많이 컸네'라며 실감할 때가 있는데, 지금처럼이렇게 씻기고 내 다리에 눕혀 머리를 말려 줄 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8살인 첫째는 남자아이라 대부분 머리카락이 짧았기에 더 어릴 때부터도 앉아서 머리를 말려도 금방 말릴 수 있었다. 하지만 둘째 아이는 딸이라 늘 머리 길이가단발이상의 길이로 긴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나를 닮아 머리숱도 꽤 많은데앉혀놓고 머리를 말리면 시간이다소 오래 걸렸고,내 손놀림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딸아이는내 다리에 눕혀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깨끗이 씻고 나온 아이는 내가 드라이기를 콘센트에 꼽고 앉아 왼쪽 다리는 길게 펴고, 오른쪽 다리를 접어 앉으면 자연스레 내 왼쪽 허벅지를 배고 옆으로 돌아 눕는다. 그러면 나는 기다렸단 듯 드라이기를 켜서, 발부터 다리 그리고 몸에서 팔과 손에 이르기까지식어가는몸을 적당 온도로 데워준다.
드라이기를 든 내 오른손은 아래서 위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복되는 정성스러운 움직임을 수행하느라 부산스럽다. 그러다 몸이 좀 데워졌다 싶으면 내 허벅지 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아이의 머리카락을, 빗 대신 다섯 손가락으로 잘 빗겨 따뜻한 바람에 흔들어 말려준다. 그러다 아이에게 "반대로"라고 신호를 주면 아이는 자연스레 또 반대로 돌아 눕는다.
"엄마 몸에 따뜻한 바람 더 해줘."
"알겠어~ 좋아? 따뜻해?"
"응~ 엄마 크게 많이 사랑해."
머리를 말려줄 때마다 이리 큰 사랑을 표현하는 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씻는 시간을 좋아했다. 아마도 어느 정도 혼자만의 사랑을 받아본 첫째와는 달리, 태어나자마자 둘이라는 현실에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해 본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 봐주고 케어해 주는 엄마의 이런 손길이 무척 좋았을 것이다.
내 아이지만 부러울 정도의 행복한 표정으로 연신 만족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게 진정한 교감이 아닐까? 아이의 이런 표정은 매번 나 또한 순간의 벅찬 행복감을 만끽하도록 돕곤 했다.
'여전히 애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우리 딸 이렇게나 키가 컸구나.'
그렇게 거의 매일 하는 행동임에도 오늘따라 또 딸아이는 누군가 쭉 하고 잡아당겨 놓은 듯 갑작스레 커진 것만 같다. 그러자 과연 이렇게 몇 년을 더 눕혀 머리를 말려줄 수 있을까란 물음에 괜스레 벌써 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들은 서로 언어를 조합하여 말로 전달하며 사랑을 전하고 확인하여 교감을 한다. 그러면서 서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런 언어로 사랑을 전달하는 것도 참 좋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스킨십을 겸하는 교감이 언어교감몇 배의 효과를 낸다는 경험에 의한 확신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곧아이들도 내 도움없이 스스로 모든 걸 가뿐히 해내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손을 잡거나 토닥여주거나 가벼운 뽀뽀나 포옹 등의 스킨십은 하겠지만, 분명 지금이기에 가능한 스킨십들이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지나온 시간들을 잠시 돌아보면 지금은 때가 지나 이젠하고 싶어도할 수 없는 스킨십들이 있듯 말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 몸이 조금 피곤하여 가끔은 번거롭고 귀찮더라도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아이들과의 스킨십을 열심히 행하며 새겨두려 한다.
비록 이런 사소한 스킨십들이 아이들 기억엔 남지 않더라도 분명 몸의 촉감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살과 살이 만나 부벼지고 스친 기억은, '나는 충만한 사랑을 받았어'라는 사실을 무의식 중 감각에 새겨, 살아가는 순간순간 용기로, 때론 투명 방패막이로 잘 쓰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아이의 몸 곳곳에 또 두피 사이사이에 내 지문을 새기듯 사랑으로 어루만진다.
사랑하는 딸, 나중에 나중에 커서 혹여 삶이 힘겹고 외롭다 느껴질 땐 꼭 엄마의 이 지문을 떠올려주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