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 만화책이 요리에 미치는 영향
직장인이 퇴근 후 집밥을 먹으려면 퇴근길부터 준비가 필요하다. 엄마와 함께 살며 아침밥 도시락을 받아 회사로 출근하고, 집에 오는 길 '나 이제 집에 가. 00시에 도착.' 같은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저녁밥이 차려져 있는 식탁으로 퇴근할 수 있는 상황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날부터 준비가 필요할지도.
우선 퇴근길부터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생각하고 조합을 해서 메뉴를 생각한다. 메뉴를 위해 추가로 사야 하는 재료를 정하고 집 앞 슈퍼에 들러 처리한다. 혹은 전날 새벽 배송등으로 시켜놨어야 한다.
이때 슈퍼는 대형마트보다 집 앞 야채가게 혹은 대형마트 브랜드의 슈퍼마켓을 이용한다. 대형마트에 가려면 아무래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집 앞 슈퍼마켓에는 할인 코너가 두 개가 있는데 그곳에 내가 원했던 재료가 있으면 운이 좋은 날. 이 코너에 있는 것들로 빠르게 메뉴를 정하기도 한다. 재료들을 집어 들고 집으로.
손발만 씻고 바로 부엌으로 간다. 메뉴에 국이 포함돼 있으면 물을 먼저 올려놓고 재료를 후다닥 준비한다. 재료를 준비하면서 어제 못 치운 설거지가 있다면 그것도 같이 처리한다. 어떤 과정으로 요리를 해야 가장 효율적 일지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면서 차려내면 빠르면 15분에 끝내버릴 수도 있는 게 퇴근 후 저녁 차리기다. 특별한 메뉴를 차리진 못해도 일상적 밥상 기준 그렇다는 거다.
극강의 P 성향(즉흥)인 내가 이렇게 J(계획)스러운 과정을 치르려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만 역시나 요리를 좋아하기에 이런 과정을 매일 견딜 수 있는 것 같다. 좋아하는 일 한정 J가 돼버린다.
나름 치열해야 하는 '퇴근 후 밥 차리기'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이유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에서 '퇴근 후 밥을 차리는'주인공의 모습을 거의 10년이 넘게 봤기 때문이다.
퇴근 후 밥 차리기를 하면서 마치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끼기에 행복하기까지 하다. (물론 만화책에서도 나와있듯 카케이 시로가 요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파트너인 야부키 켄지가 그 외의 것들을 분담한다.)
내가 앞에 묘사한 이 과정들이 '어제 뭐 먹었어'의 모든 회차 스토리라인이다. 변호사인 카케이 시로가 자신의 파트너와 살면서 밥을 해 먹는 이야기가 이 만화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다. 사실상 '카케이 시로의 집밥 레시피북'이 이 책의 부제라고 볼 수 있다. 번외로 '야부키 켄지의 야매 레시피'가 가끔 들어간다. 그들이 각자 직장을 다니면서 집밥을 해 먹고, 가끔은 이웃이나 친구들과 파티 음식도 해 먹는 이야기들을 10년 넘게 보는데 지겹지가 않다.
찾아보니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는 2008년에 출시됐다. 최근 20권이 나왔으니 '어제 뭐 먹었어'를 읽은 만큼 나의 요리실력도 향상되고 있는 것 같다. 2019년부터는 드라마로까지 제작이 됐다. '드라이빙 마이카'에 나왔던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무려 카케이 시로였다. 정말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만화에서 켄지역을 정말 좋아하는데 드라마 속 배우엔 그 몰입이 안되긴 했다. 왓챠로 몇 편을 봐보긴 했는데 역시 레시피북(?;;)의 특성상 책으로 보는 게 익숙하다.
대학시절 나의 공강 시간의 20%는 사용한 것 같은 '북새통'(북새통은 만화책 대부분 커버를 싸놓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다. 구매만 할 수 있는 장소. 그래서 20%. 만약 책을 읽을 수 있는 형태였다면 90% 정도였겠지)에서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책은 그게 뭐든 다 구입했다.
요시나가 후미는 은근 다작을 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어떤 만화는 매우 맘에 들었고 어떤 만화는 솔직히 읽다가 포기했다. 작가의 단편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요시나가 후미의 이야기를 하려면 또 삼천포로 빠질 것 같으니깐 '어제 뭐 먹었어' 만화책 이야기만 해보겠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역시 '어제 뭐 먹었어'의 유용성 때문이다. 이야기나 대사들도 재미있지만 역시 실용성이 큰 책이다. 물론 일본식 집밥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집밥을 하는 사람이 따라 할 요리는 한정돼 있긴 하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직장인 집밥러'가 갖춰야 할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앞서나 온 J스러운 모먼트도 그렇고 그저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얼마 전 카케이시로와 야부키 켄지가 주말인가에 해 먹었던 크로켓 빵과 토마토 수프 메뉴를 그대로 따라 해 본 적 있다. '매콤한 된장소스를 끼얹은 오크라'는 빼고 따라 했는데 역시 힘들었다. 카케이 시로의 요리실력은 주부 9단이기 때문에 주부 1~2 단급인 내가 이것을 맨날 하기란 힘이 든다. 이런 튀김요리는 퇴근 후가 아닌 주말에나 할 수 있다. 그래도 뿌듯했던 레시피 따라 하기 시간이었다.
감자 크로켓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은근히 귀찮은 과정이다. 우선 감자를 깨끗하게 손질해서 삶고, 후추를 넣어 잘 으깨준다. 나는 크래미를 좋아해서 감자를 으깬 것에 크래미를 찢어 넣어줬다. 감자 으깬 것과 크래미를 넣은 것을 손바닥에 잘 펴주고, 그 안에 치즈를 잘라 올려두고 동글동글 빚어준다. 이 동글동글한 것만 봐도 아주 예쁜 자태다.
나는 왜 수많은 만화책 중에 '퇴근하고 들어와서 밥상을 차리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그것이 스토리의 전부인 만화를 가장 좋아하는 것일까. 책 '타샤의 그림'(지은이 타샤 튜더)의 첫 장에 나오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아주 작고 세밀한 부분까지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는 일, 마침내 그것을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게 될 때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다.
-윌리엄 모리스
나의 일상생활 속 행위들이 '예술의 경지'까지 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때맞춰 정성 들여 밥을 먹고 집을 치우는 행위들을 하다 보면 별 게 아니어도 '오늘도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또한 이런 작은 것에 정성을 들이는 타인을 보면 그 사람이 참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렇기에 나 역시 나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 노력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윌리엄 모리스가 말한, 행복의 비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