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분의 집안일'을 받아들이기까지
'나를 깨끗한 환경에 두기.'
매년 1월 1일 내가 세우는 계획 중 하나다. 몇 년 전 새해 계획을 발표하는 작은 자리가 있었는데 이 계획을 들은 행사 진행자(?)가 "신선한 계획이네요. 이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의 계획을 듣게 되는데 대부분 비슷한 모양새인데. 재미있으시네요."라고 말했다. 물론 립서비스도 있었겠지만 기분이 좋았다. '내가 변하긴 변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깔끔한 사람은 못된다. 애초에 깔끔한 사람이라면 사실 저런 목표를 세울 필요도 없다. 내 나름 성장한 부분이라면, 과거엔 저런 목표를 세우질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저런 목표를 세우는 사람을 보면 '참 할 일이 없으시네' 혹은 '주변이 더러워도 할 일만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내가 바뀌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약 6년 전, 청소와 요리 등 집안일이 하기 싫어 진행한 상담이 변화의 '트리거'가 됐다.
나는 자취를 매우 늦게 시작한 편이었다. 그러나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결혼을 하게 돼 사실상 제대로 된 자취를 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결혼과 함께 자취를 감춰버린 자취 생활. 28년 동안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았던 나로서는 처음으로 쏟아지는 집안일과 가정을 위한 행정일에 맞닥뜨리게 된 계기가 됐다.
집안일을 하나도 할 줄 몰랐던 나에겐 벅찬 일로 느껴졌다. 이미 자취 10년 차였고 자취집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있던 당시 남자친구(현 남편)는 매번 내가 하는 집안일이나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는 속도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남편이 여러 가지 일을 해놓을 동안 나는 한두 개의 일을 겨우겨우 처리할 뿐이었다. 나는 급작스럽게 몰아치는 집안일들에 지레 겁을 먹었다.
'아니 결혼하면 이렇게 많은 일들을 맨날 처리해야 한다고..? 다들 이렇게 산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당연하게 해야 할 '1인분의 집안일'을 부모님이 대신해 줬기에, 집안일에 대한 기본이 하나도 없어 더욱 벅찼던 것 같다. 당연히 해야 할 일도 '내가 결혼을 하기 때문에 해야 할 집안일이 늘어난 거야'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집안일과 결혼에 대한 고민이 커져갔다. 그런데 마침 어떠한 사건 때문에 심리상담가를 취재할 일이 생겼다. 2시간가량 카페에서 인터뷰를 한 후 살며시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상담가는 자신이 아는 '가족 전문 상담가'를 소개해주었다.
당시 상담일지를 살펴보면, 그때의 나는 '일' 외의 것에서 나의 '성장'을 연결시키기 어려워했다. 나의 시간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랑'은 마치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 같은 느낌이었다. 사랑을 필요로 했지만 버거워했다.
사랑이나 돌봄을 나의 일과 신념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사랑과 돌봄에 거리를 두려 했다. 나의 시간과 변화를 요구하는 가족이나 애인들을 나의 '방해자'로 인식했던 면도 있었기에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에 몰두하다가(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일에 몰두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도대체 뭘 했던 거지..) 집에 오면 뻗어버리는, 집안을 1도 돌보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가족과 애인이라면 '이렇게 힘든 나'를 서포트해 줘야지, 안 그래도 힘든 나에게 또 시간을 내는 것을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독한 응석받이였던 것이다.
상담을 통해 이런 생각의 뿌리를 파헤쳐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엄마처럼 '다른 사람의 몫인 집안일'까지 모두 떠맡는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가게 될까 봐 굉장히 두려워했었던 것 같다. 1년 이상 '취업 준비생'으로 살다가 직업을 얻은 터라 직업을 잃는 것에 두려움이 큰 시기였다. 그것이 일에 대한 몰두와 집안일을 내팽개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런 생각의 흐름이 '1인분의 집안일'도 맡지 않으려는 이기심으로 나타났다.
상담 막바지의 어느 날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자취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를 물었다. 나는 꼴에 '독립'이라는 단어를 들먹였다.
'나는 집안일을 하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은 제대로 된 '독립'을 방해하는 마음이 될 것 같아요. '독립'이라는 것은 집안일과 일을 모두 해낼 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많은 이들은 일에만 몰두하고 집안을 돌보지 않는 가부장적인 인간을 비난한다. 그런데 종종 이런 비난에 빠져, 자기 자신도 집안일을 거부하며 스스로가 그 비난을 받는 대상처럼 행동한다. 나처럼 집안일을 하지 않고 가족에게 미루거나, 더 나아가 집안일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과시하기도 한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은 자신도 적절한 집안일을 하고, 함께 살아가는 상대에게도 상대방 몫의 집안일을 분담하며 배려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한 가정부를 고용한다고 하더라도 평생 집안일을 '하나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가정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더럽힌 자리는 스스로 깨끗하게 치우고, 가끔은 자신이나 남을 위한 요리를 만들 줄도 아는 사람이 어른스럽다. 내가 남편의 자취집에 처음 갔을 때 그 깔끔한 살림에 매력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집안일이라는 것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전환'의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일이 낮이라면 집안일은 밤이 되겠죠. 밤이 없으면 낮은 즐겁지 않죠.
일에만 성장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상담사님이 해주신 말씀은 생각의 전환점이 됐다. 일을 하면서 힘들 때 책상 정리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 옷장도 정리하고, 가끔은 요리를 해보기도 했다. 선생님의 말대로 몸을 움직이니 피곤함도 오히려 적게 느꼈고 일 외의 다른 활동으로 인해 기분 전환이 되기도 했다.
짧은 횟수의 상담이었지만 상담을 마치고서는 집안일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생활하는 환경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됐다.
물론 수많은 통계 속에서 입증되다시피, 남성보다 여성이 집안일을 많이 한다는 현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예민한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알고 있다. 내 이야기는 이미 다른 사람의 몫까지 집안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향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집안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몫까지 전가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글이다.
다시 한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 몫과 가족이나 파트너와의 몫을 잘 분담해야 하고, 나 역시 내 몫의 집안일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분담을 하며 생기는 갈등 역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 과정에서 내 몫의 집안일을 할 때 지나치게 싫어하거나 억울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체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몫의 집안일을 할 때도 지나치게 괴롭다면 스스로의 삶이 더 힘들어지고, 꼬여갈 뿐이다.
개리비숍 역시 책 '시작의 기술'에서 집안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실제보다 나쁜 일로 인식한다고 꼬집었다.
간단한 예로 여러분이 질겁하는 집안일을 한번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집안일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마음속에서 그 일을 실제보다 더 나쁜 일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빨래 개기나 설거지처럼 간단한 일은 사실 시간이나 노력이 별로 들어가지 않음에도 우리는 종종 회피한다. 작지만 집요한 이런 숙제들이 늘어나고, 때로는 더 크고 중요한 일과 겹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는 게 버겁다고 생각하기 쉽다.
-'시작의 기술' 21p
집안일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꾸역꾸역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면 독립된 어른이 되는 것을 방해한다. 내 몫의 집안일을 할 수 없으면 제대로 된 독립도 할 수 없다.
최소한 1인분의 몫은 할 것. 이것은 일에서나 집에서나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