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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un 22. 2023

컨셉병은 죄가 없다

'지저분한 괴짜' 콘셉트에서 '정갈한 사람' 콘셉트로

*컨셉의 바른표기는 '콘셉트'이지만 '콘셉트병'은 읽을 맛이 안 나므로, '컨셉병'으로 씁니다.


요즘 나는 청소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문장을 내가 쓰고도 낯설다.


예전에 기자출신 방송인인 허지웅이 청소에 꽤 열정적인 모습을 봤을 때 '왜 저렇게 청소를 좋아하지? 깨끗한 척하고 싶은 가봐'라고 생각했다. 혹은 '저렇게 청소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나는 꽤 더러운 스타일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청소를 잘 못하고, 방도 지저분하게 썼던 과거를 우리 가족과 남편은 알 것이다. 아빠와 오빠는 깨끗한 사람이었다. 집에서 아마 내 방이 가장 더러웠을 텐데, 그래서 자주 잔소리를 들었다. 아빠는 종종 내방을 깨끗하게 치워주셨는데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유년시절, '방이 지저분한 천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은 MBTI가 유행이라지만 당시엔 혈액형별 성격 이야기가 유행이었다. 나는 AB형인데 종종 AB형은 괴짜나 천재로 묘사됐다. 천재들의 방은 더럽다는 이야기, 혹은 미디어에서 비치는 똑똑한 사람들의 책상이 서류 더미로 가득 찬 모습 등을 동경했던 것 같다.


모빌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의 작업실. 그의 작업실은 자유분방(?)하기로 유명하다.


중학교 때부터는 장래희망으로 패션지 기자를 꿈꿨었는데, 미디어에서 비치는 기자들은 항상 약간 지저분했고 책상도 서류더미나 옷더미 등으로 쌓여있었다. 그러니 나는 사실 태생적으로 지저분한 사람이라기보다, '지저분한 천재'의 이미지를 동경한, 지저분함을 지향(?)했던 것이다. (변명하기 대회 1등 할 듯)

 



돌이켜보니 그때가 '컨셉충'의 시작은 아니었다.


8살 때 초등학생이 되고 열었던 첫 생일파티가 기억난다. 그때 나는 캐릭터 '푸'를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새 학기 거의 모든 용품들을 푸와 관련된 것들로 채웠다. 조금 집착에 가깝게 푸와 관련된 용품을 모았던 것 같다. 반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쟤는 푸를 좋아하나 봐'라고 이야기를 했고, 생일파티에 온 10~20여 명의 아이들이 모두 푸와 관련된 학용품을 사 왔다.


어릴 적이라 매우 기억이 흐릿하지만, 5~6개 정도 선물을 풀었을 때는 푸와 관련된 학용품이 나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지만, 10개 정도가 넘어갔을 때는 '이건 좀 아닌데'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겹치는 선물도 많았다. 여하튼 그때 지나친 컨셉충으로 사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나 컨셉충의 삶은 멈춰지지 않았다.


20대 후반 입사를 한 후 나는 깨끗한 사람인 척 콘셉트를 잡았다. 내 책상은 우리 회사의 책상 중 가장 깨끗한 곳이고 싶었다. 그래서 예쁜 데스크 매트를 사고, 연필꽂이나 명함 꽂이도 장만했다. 옆 사람이 보이지 않게 보드 같은 것도 설치하고, 유튜브에서 '데스크 테리어' 같은 콘텐츠를 살펴보기도 했다. 퇴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내 책상을 깨끗하다고 생각하겠지?' 하는 망상을 하면서 나가기도 했다. (INFP의 면모..)


남편과 같이 살면서 초반에는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결혼 2~3년이 지난 이후에는 그래도 나름 깨끗한 집을 유지했다. 그때부터 나는 '살림을 잘하는 정갈한 사람' 콘셉트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살림을 꾸리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도 했고 유튜브 정리마켓의 '전국 살림 자랑' 콘텐츠를 보면서 살림을 잘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생기기도 했다. 무인양품 스토어에 갈 때마다 그 정갈한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그렇게 정갈한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https://youtu.be/eHGb_ngM02o 



오늘도 아침에 일찍 깬 김에 집안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30분 정도라도 매우 집중해서 집을 치우고 커피를 한잔 하면, '깨끗한 사람' 콘셉트 놀이로 인한 쾌락은 극대화된다.


여전히 '정갈한 사람' 콘셉트가 마음에 든다. 몇 년을 이 콘셉트를 유지하고 있으니, 애초에 깨끗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 착각도 느낀다. 컨셉병으로 인한 것이지만 깨끗한 황경에 앉아있으니, 콘셉트든 진짜든 무슨 상관인가 싶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꽤 오래된 기사지만, 내가 콘셉트를 생각할 때 항상 떠올리는 레전드 기사가 있다. 2020년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 실렸던 백종원 인터뷰 기사다.


"원래부터 착한 놈이 어딨어요(웃음)? 제가 사실 입도 거칠어요. 그런데 방송하려니 도리가 없어요. 겸손한 척, 착한 척, 순화해야지. 방송에서 하던 대로 밖에서도 말하니, 처음엔 직원들이 "어디 아픈가?"했대요(웃음). 참 이상한 게, 사람들이 저의 ‘척'을 진심으로 받아주니까, 자꾸 ‘이런 척' ‘저런 척' 더 하고 싶어 져요. 그렇게 출연료, 광고료 여기저기 기부도 하면서 마음 부자가 돼가요. 저 원래 그런 놈이 아닌데, 점점 ‘척'대로 되어가요(웃음)."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01/2020020100268.html


어릴 적 빠졌던 '지저분한 천재' 콘셉트는 지금 생각하면 해로운 컨셉병이었다. 나는 요즘 걸린 이 깨끗한 컨셉병이 꽤 마음에 든다.


역시 컨셉병에 걸리더라도 해롭지 않은 콘셉트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컨셉병 자체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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