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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an 25. 2024

루틴의 조건

라떼파의 커피 루틴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가기 전, 부엌의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놓는다. 물을 올려놓고 샤워를 하고 나온 후, 미리 끓여놓은 포트의 물로 커피를 내린다.


그래서 우리 집에선 아침마다 과일향 원두의 커피 향이 퍼진다. 나의 남편이 나의 남자친구가 되었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도 바로 그의 이 루틴 때문이었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음악을 틀고 커피를 내려주는 모습 때문에 '이 남자랑 결혼해도 좋겠는 걸?'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의 이 루틴은 여자친구를 만들어보겠다는 심산의 보여주기식 루틴이 아니었고, 결혼한 지 6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다.


나는 그에게 커피를 얻어먹는 아침이 행복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는 산미 강한 얼죽아(얼어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파 였고 나는 뜨겁고 꼬수운 라떼파였던 것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에도. 나는 크림 라떼(왼쪽), 남편은 아아(오른쪽).


그가 아침에 잘 내려놓은 커피의 반은 자신의 텀블러에 넣고 출근을 하며, '커피 내려놨으니 잘 마셔~'라고 하는 것이 참 고맙지만, 나에겐 너무나 차가운 얼음 동동 블랙커피였던 것이다.


차가운 얼음 동동 블랙커피는, 초콜릿 무스 케이크나 치즈 케이크와 함께여야, 혹은 토스트 정도는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였다.  


나도 그가 내려놓은 커피로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한 적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커피애호가여서 그가 쓰는 원두는 꽤 비쌌다. 나름 커피 레시피라는 것도 있어서 커피 저울을 사용해 내리는 커피였다.


실제로 굉장히 맛있는 커피긴 하다. 웬만한 카페에서 커피를 사 먹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정말 맛있다고 소문난 카페의 가장 비싼 드립 커피 정도를 마셔야 비슷한 맛이 났다.


그래, 맛은 인정하는데... 왜 나는 이 얼음 동동 블랙커피에게서 나의 하루 '카페인력(力)'을 받을 수 없는 몸인 것일까.


브런치를 먹을 때는 커피 담당이 내리는 커피가 아주 딱 맞다.




나는 따듯하고 눅진한, 꼬수운 플랫화이트를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아무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도 하루에 한잔은 꼭 라떼를 먹고 싶어 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굳이 밖에서 커피를 사 먹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됐는데도 라떼를 끊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기와 산책하기가 어려웠던 신생아 시절에는 콜드브루 한통을 사서, 두유에 타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눅진한 라떼맛은 아니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아기가 유모차를 타고, 혹은 아기띠를 하고 외출이 가능해지자 나는 하루에 한 번 산책을 나가면서 라떼를 사 왔다.


그런데 요즘 물가가 비싸니 라떼 한잔을 사면 4000~5000원이 매일 나가게 된다. 사실 다른 데엔 돈을 안 쓰고 이것만 사 먹는다면 한 달에 15만 원 안팎으로 지출할 만한 비용이지만, 우리 부부는 나름 맛있는 것도 자주 사 먹고 쇼핑도 많이 하는 편이라 나 혼자 있을 때 이렇게 지출을 하는 것은 무언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집밥을 가볍게 해 먹는 이유도 있다. 둘이서 노는데 돈을 많이 쓰기에..)




그래서 요즘 정착한 라떼 레시피는 이것이다.


아몬드 우유를 컵의 반컵 정도 붓고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 돌린다. 그리고 카누 '라떼' 한잔을 탄다.


이렇게 먹었을 때, 아주 맛있는 카페의 라떼 맛은 당연히 못 따라가지만, 밖에 나가서 또 라떼를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레시피는 종종 밥맛이 없어 카페라떼 정도만 마시고 끼니를 건너뛰고 싶을 때, 항상 먹는 루틴 레시피가 됐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라떼를 좋아한다면, 우유 스팀이 되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라고 했다. 그럼 집에서도 맛있는 라떼를 해 먹을 수 있다며. 음, 듣기만 해도 귀찮다.  


아몬드 우유와 카누 라떼의 조합.. 라떼파라면 한번 해먹어 보세요


이 라떼(?)를 매일 마시면서 든 생각이 있다.


진짜 '루틴'이 되려면 돈이 들지 않아야 하는구나. 한마디로 부담스럽지 않아야 한다.


물론 여유로운 사람이라면 매일의 루틴에 돈을 쓰는 게 부담은 되지 않겠지만, 매일매일 오랫동안 루틴을 지키려면 부담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산책을 나가 라떼를 사 먹는 것, 혹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라떼 만들기를 루틴으로 만들지 못한 이유다. (물론 그냥 거기에 돈을 쓰겠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비용이긴 하지만^^; 돈도 돈이고 귀찮기도 귀찮다.)


특히 혼자 밥, 간식을 먹을 때 배달을 하지 않고 집밥을 해 먹는 이유에는 속 편한 음식을 먹으려는 것도 있지만 절약을 위한 것도 있으니.


많은 이들이 꾸준히 하고 있는 루틴들은 대부분 돈이 들어가지 않는 일일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이불 정리하기, 음악 틀기, 스트레칭하기, 혹은 달리기, 아로마 향을 피우기 등등. 돈이 아예 들지 않거나 누구에게나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의 비용만 드는 정도여야 꾸준히 루틴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맞춤법에 따르면 라떼가 아니라 라테인데, 이 글에선 라떼라고 썼습니다. 라테는 뭔가...자장면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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