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을 먹더라도 깨끗한 곳에서 먹고 싶어
"아기 잘 때 집안일 하지 마세요."
육아 조언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낮시간 아기가 잘 때면 집안일을 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기가 생기면 집안일이 2~3배 늘어난다. 게다가 아기 물품으로 인해 물건이 너무 많아져 집안은 항상 어수선하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아기가 자면 '집중 집안일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아기가 잘 때 집안일을 하게 되면 매우 지치게 된다. 낮잠을 길게자는 아기도 있겠지만 보통 아기들은 낮에 금방 금방 깬다. 집안일을 하고 한숨 돌리려 하면 아기는 깬다. 집안일을 한 후 '커피 한잔 마셔볼까', '책 조금 읽어볼까' 등 내 시간을 가지려고 하면 아기는 깬다.
그렇기에 "아기 잘 때 집안일 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아기가 자면 집안일을 하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먼저 하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매우 실천하기 어렵다. 나 역시 이 조언을 듣고 아기가 잘 때 집안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해 봤다. 아기가 자면 우선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으려 해 봤다. 근데 그게 잘 안 됐다. 왜일까.
왜냐면 나는 '깨끗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기 때문'이었다. 깨끗한 곳에서 책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깨끗한 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많은 활동들의 전제는 '깨끗한 곳에서'가 생략된 것이었다.
게다가 아기를 돌보느라 억제된 나의 욕망 속에서 이 욕망은 더욱 크게 솟아났다. 아기를 위한 장난감 등으로 해쳐진 집안 인테리어 때문에 안그래도 마음에 안드는 집안인데 지저분하기까지한 환경이라면 뭘해도 만족스럽지 않다. 청소라도 한 후 앉아있어야 마음이 시원한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깨끗한 곳에서' 하고 싶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 2021년 남편과 제주 여행을 갔을 때였다. 이때 남편이 예약한 '선현재'라는 숙소에 묵게 됐다. (광고아님, 지인 아님)
선현재는 헤밍웨이의 소설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단편 소설의 콘셉트를 가져온 숙소였다. 들어가자마자 헤밍웨이 '깨끗하고 밝은 곳' 책이 놓여있다.
이 단편은 매우 단순하다. 줄거리랄 것도 없다. 한 노인이 자주 가는 술집이 있는데, 그곳의 두 바텐더의 대화가 소설의 전부다.
한 바텐더는 노인만 나가면 마감을 할 수 있는데 안 나가는 노인이 원망스럽다. 마감시간보다 일찍 노인에게 나가달라고 한다. 다른 바텐더가 왜 그러냐고 묻자 "노인 혼자 술 먹는데, 사실 집에서 먹나 여기서 먹나 똑같은 거 아니야?"라고 말한다.
이후 다른 바텐더는 말한다. 그건 다르다고. 왜냐면 혼자라도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머무르는 것은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라고.
헤밍웨이의 문장으로 읽으면 이 별거 없는 내용의 단편이 '오...!' 하는 감탄으로 돌아온다. 공감과 함께 숙소가 정말 깨끗했기 때문에 더 크게 와닿았다.
숙소의 콘셉트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콘셉트를 활용하고 책을 배치해 두면서 어쩌면 숙소를 운영하는 사람의 자신감과 다짐을 엿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숙소의 콘셉트는 '깨끗하고 밝은 곳'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우스운 꼴이 되니까. 손님들에게 이곳은 깨끗한 곳이라는 것을 천명하면서, 동시에 그곳을 그렇게 관리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실행하게 되는 프로세스인 것이다.
저 소설을 읽고 난 후 내가 카페나 전시관을 가는 것을 왜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됐다. 그곳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깨끗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청소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점차 변했다. 이 경험 이후로 나의 인생 목표에는 항상 '나를 깨끗한 곳에 두기'가 빠지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치고 집이 매우 깨끗한 것은 아니라 머쓱하지만) 아이가 자는 시간, 집안일을 하지 않기가 어려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