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늙은 어부의 노래
바다로 가기로 작정하고 컨설팅회사를 찾은 건 한 마트에서 한 달 치 월급으로 120만 원을 받고서다. 하루 꼬박 13시간씩 일을 하고 받은 그만한 돈으로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계산이 선 것. 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이상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즈음, 퇴직금으로도 못다 갚고 남아 있는 금융권의 빚은 나를 단두대에 세운 죄수로 만들었다. 나는 ‘째각, 째각’ 시계의 초침 소리에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힌 사형수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5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1849년 12월 칼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손발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채 교도소 사형장에서 총살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같은 해 봄, 반체제 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것.
집행관은 노리쇠를 ‘찰카닥’ 하고 잡아당겨 실탄을 장착한 뒤 다시 전진시켰다. 그리고는 도스토예프스키 심장에 총구를 겨누었다. 방아쇠만 당기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저승길로 가야만 했다.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심장이 그대로 멎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이때, 집행관이 차가운 바람을 뚫고 외쳤다.
“이제, 사형집행 전 마지막 5분을 주겠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5분이라니… 정말 이대로 죽는단 말인가! 5분 동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저 머릿속이 하얘질 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집행관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심장을 찔렀다.
“이제 3분 남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흑~’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이 순간 무엇인가 하기는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먼저, 가족과 친지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이제 후회할 시간조차 없구나!’ 하고 한탄하면서 보다 처절하게 살지 못한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겠구나!’ 생각하니 살아 있는 세상의 소중함에 저절로 눈물이 두 뺨을 적셨다.
“이제 1분이다!”
집행관의 서릿발 같은 외침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장을 도려내는 듯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초침이 시계판 0(12)에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크게 울리는 듯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초침 소리마저 들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윽고, 방아쇠를 걸어 잡은 집행관의 손가락에 힘이 주어졌다.
그때였다.
“멈추시오~ 사형집행을 멈추시오!”
큰 소리로 외치면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병사가 있었다.
‘사형을 면하고 유배형에 처한다’는 황제의 칙령을 가져온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저승길에 오를 찰나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저승문 앞에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는 동토 시베리아 유배지의 수용소에서 4년간 있으면서 말 그대로 ‘하루를 산다’는 일념으로 창작에 매진했다. 종이와 같은 필기구가 없었던 수용소에서 그는 작품을 머릿속에 쓰고, 모든 것을 다 외웠다고 한다.
유배형이 끝난 뒤 도스토예프스키는 결혼을 하고, 시베리아 유배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년)과 그의 전기前期 창작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는 <학대받은 사람들>(1861년)을 발표하는 등 많은 명작을 남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은 5분의 연속’이라 여기고 사형집행 전의 마지막 5분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그렇다. 마치 단두대에 선 것처럼 은행 빚만큼 나를 옥죄는 것은 없었다. 그간 금융권으로부터 대출금과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등 이자 미납에 대한 독촉 전화에 너무도 시달리고 있었던 것. 바다로 가고 나면 이 독촉 전화는 더욱 빗발치리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그 지긋지긋한 독촉 전화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게 큰 위안이었다. 그 뒤 문제야 어찌 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