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늙은 어부의 노래
KY○7호가 정박을 풀고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KY○8호가 뒤를 따른다. KY○7호에 몸을 얹은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바다로, 바다로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 어떤 험한 일이 닥치고, 힘겨운 일을 감내해야 할 것인가 따위는 생각지도 못한 채. 단지 걱정이라면 아이들이 탈 없이 잘 지내주는 것, 특히 군에 있는 맏이가 군 생활을 잘 이겨내었으면··· 하는 것 등이다.
출항한 지 어느새 두어 시간. 호수 같은 다도해를 지나치니 멀리 한라산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아, 이제 제주도 근해에 왔나보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나는 그 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선원들이 일제히 바삐 움직이는 데 따라 눈치껏 보조를 맞추었다. 배 반장에게 물으니 그물을 내릴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배 반장 곁에서 그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선원들은 선장을 제외하고 모두 9명이다. 선장 바로 아래 계급(?)의 항해사가 있었고, 기관장과 기관사 각 1명, 갑판장 1명과 나를 비롯한 갑판원이 4명이다. 여기에 선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조리사 한 명도 있다.
항해사는 선장을 도와 전체를 컨트롤하는 것 같았다. 해도를 읽어 항로를 찾고, 육지 또는 건너편의 2호선과 통신을 하고, 어군을 탐지하는 일 등이 그의 임무인 것 같다. 어쩌면 이 배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띤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선지 그는 어로작업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기관장과 조리사 역시 어로작업에서 제외되었다. 기관장의 임무는 배의 기관이 아무 탈 없이 작동되게 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뱃일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잠시도 기관실을 벗어날 수 없는 것. 조리사는 우리가 갑판에서 일을 하는 동안 선원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한다.
그물을 내리거나 올리는 일은 갑판원이 하는 주요 임무이다. 갑판원은 갑판장 밑에 배 반장이 있었고, 중국인 2명과 그리고 나였다. 기관사는 기관장을 도우면서, 실제론 우리와 함께 주로 어로작업을 한다. 물론 기관장도 가끔, 고기 상자 밴딩banding 작업을 할 때 일을 거든다.
갑판장은 다소 기인 같았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이 바닥에서 뼈가 굳어진 듯했다. 그런데 영락없이 소설가 이외수를 닮았다. 얼굴이 닮은 게 아니라, 이외수보다 더 긴 머리카락을 묶어 늘어뜨리고 있다. 바짝 마른 체구도 이외수와 비슷하다. 나는 실상 그의 직속 부하였다.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가급적 그의 비위를 맞추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참고로, 이외수 소설가는 2022년 4월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고, 내가 어선을 탔을 때는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조리사 역시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탓인지 닳을 대로 단 사람 같다. 그는 가끔 막 잡아 올린 생선으로 회를 떠주기도 하고, 어종을 바꾸어가며 매운탕을 끓여내는 등 나름 밥상 차림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나는 한동안 그가 차려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미끌미끌 기름기가 흘러 늘 휴지로 닦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 성격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젠가 선장이 이를 지적하며 “식기들을 세제로 좀 깨끗이 씻으라.”고 말했을 때 속이 다 후련했다. 반찬도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특히 비위가 약한 나는 깔끔하지 못한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해선 무엇이든 먹어야만 했으니….
조리사는 다소 거친 듯해도 인정머리는 있었다. 그는 내게 “맛이 없어도 많이 먹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멀미를 하더라도 한사코 먹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내게 다른 선원 몰래 종이컵에 소주를 한 잔씩 따라 주기도 했다. 사실 배에 실린 술은 사관(직책에 ‘사’ 자가 들어있는 사람)들이 자비自費로 사온 것이다. 실제는 나와 같은 일반 선원은 술을 먹어서는 안 되는 일.
다른 사관들이 못 마땅해하면 조리사는 “아따 그래도 영좌인데, 술 한잔해도 안 되겄소.” 하면서 그들을 무마했다. 조리사는 나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것 같았다.
‘영좌領座’는 직급에 상관없이 그 집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예우해서 부르는 호칭. 물론 일정한 절차에 의해 영좌가 되면 실적급 퍼센티지가 더 올라가는 등 상응한 대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난 공식적인 영좌가 아니었고, 그냥 그들이 편의상 그렇게 불러 준 것뿐이다. 아마도 배를 오래 타게 되면 ‘영좌’의 직함을 공식적으로 주는 모양이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갑판원 등 승선 정원은 13명 이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선원 희망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기존 선원들이 인원이 늘어나는 것을 그리 원치 않아 늘 부족한 상태로 출항한다는 것. ‘실적급’이라는 임금체계가 그들로하여금 노동강도를 감내할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일정 어획고의 수익을 13명이 나누는 것보단 10명이 나누는 것이 배당률이 더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선원 10명 가운데 배 반장과 나, 조리사는 이번 항차에서 KY○7호를 처음 탄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쭉 함께 일을 해온 것 같았다. 중국인 가운데 유劉 씨라는 사람은 30대 후반이었고, 조趙 씨는 30대 초반이었다. 그들은 같은 동네 사람으로, 한국에 와 이 배에서 일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고국에 처자식을 두고 한국으로 와 배를 타고 있었다.
언젠가 선장이 이들에게 “계약 기간을 1년 더 연장해주고, 임금도 올려주겠다.”고 말한 것을 옆에서 들었다. 선장은 그들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들은 한국말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일을 잘했다. 선원이 없어 쩔쩔매는 판국에 이들 중국인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