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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심해지는 손가락 통증

<에세이> 늙은 어부의 노래

by sunb

이날은 냉동고 작업을 엄청 ‘빡세게’ 했다. 그동안 영하 60도의 급속 냉동고에 넣어 둔 고기 상자를 꺼내 밴딩banding 작업을 했다. 그리고 밴딩한 고기 상자를 일반 냉동고(영하 20도)로 옮기는 작업을 거의 한나절 동안 한 것. 어상자를 옮기면서 나는 허리가 아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근육에 무리가 온 듯했다. 그러나 아프다는 시늉조차 할 수 없었다. 선원 누구 한 사람도 노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맡아야 할 포지션position을 대신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날 2차 양망 후, 냉동고 정리 작업까지 끝내고 나니 시간은 밤 9시. 선원 모두 휴식을 취하거나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오랜만에 샤워를 했다. 해수를 정수해 식수도 하고, 몸을 씻는 물로 사용한다.

호스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물을 몸에 뿌리면서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했다. 갈비뼈가 앙상한 육신이 너무나도 초췌해 보였기 때문.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다. 넘어져서 다치고, 기계를 다루다 제대로 못 해서, 냉동 고기 상자를 나르다가 넘어지고 찧어서 생긴 자국들이다.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상으로 들어가 누웠다. 가능하면 잠을 많이 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쉬 잠이 오지 않는다. 아이들을 생각하노라면 착잡하기 그지없다.

군에 있는 맏이는 그렇다 쳐도 둘째가 걱정이다. 둘째는 Y대 경영학과 2학년을 마치고, 제 형보다 먼저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아이가 충주에 있는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을 때, 나는 두 번 면회를 갔다. 부대 배치를 받은 지 얼마 안 됐을 때가 첫 번째 면회였다.

아이를 영내에서 만나 불고기를 사준 정도였다. 부대 내 장교식당인데, 평소엔 사병 출입이 제한된다. 하지만 면회 온 가족과 함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돼 있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부대에서 외출을 허가해 주었다. 그래서 부자가 함께 충주 시내로 나가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영화도 봤다.

군에 있을 때, 가족들이 면회를 오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다. 모처럼 영내를 벗어날 수도 있고, 몇 시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 아이 둘을 군대에 보낸 나는 그러나 아버지로서, 별로 해준 게 없다. 아이 엄마는 둘째에게 면회를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영업소 일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든 국방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아니, 반드시 군대에 가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 국방의무를 요리조리 회피하는 족속들을 보면 정말로 뿔이 난다. 더욱이 두 아이를 거의 강제적으로 군에 보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 뇌물을 주고 입대를 기피한 사람들을 증오했다. 아마, 나도 돈이 많았거나 권세가 있었더라면 그들처럼 어떻게든 아이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민초에 불과했던, 많은 나이의 내가 직접 군대를 경험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또 그 뒤를 밟고 있다는 것은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1997년 대통령선거 때의 일. 여당 아무개 후보 아들의 군면제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젊은이들은 국가관이나 가치관에 많은 혼동과 갈등을 빚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아직 중 고등학생이었지만, 후보 아들의 군 면제문제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문제는 2002년 대선에서도 많은 논란을 빚었다. 여당 후보와 관련된 그 사건을 수사한 검찰이 ‘금품을 주는 등 의도적인 면제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결론지으면서 그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젊은이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병역면제를 받고 싶다’는 심리를 갖도록 했다. 그리하여 인터넷에는 다양한 ‘병역면제’ 방법들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20대 초반, 군대에서 썩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나이… 누구나 면제받기를 원하나, 아무나 면제를 받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 면제받는 법을 소개한다’는 내용에서부터 ‘검지 절단술’ ‘문신’ ‘국제결혼’ ‘다한증 수술’ 등 병역을 면제받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두 아이가 자신들을 굳이 군대에 보내려고 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니 부끄럽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아버지의 의사를 존중, 입대를 기꺼이 했다. 그것이 당시 처해 있던 아버지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여겼을 터.


군복무와 관련해서, 여권女權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로서 또 뿔이 난다. 이전에는 군 제대자에게 공무원시험 등에서 5%의 가산점을 주는 등 소정의 혜택을 주었다. 그런데 여성들이 남녀차별이라고 들고 일어나 철폐를 주장하는 바람에 그런 제도가 없어져 버렸다. 여성들의 표를 의식한 얼빠진 국회의원들이 법규를 개정해 버린 것.

황금기의 20대, 그 아까운 2년여(지금은 18개월)를 국방의무에 바친 젊은이들에게 그만한 아량조차 베풀 수 없는 나라. 아니, 이 나라의 소수 여성들. 그들도 어머니가 아니던가. 아마도 이 땅의 진정한 어머니라면 군복무를 마친 자기 아들이 눈곱만한 혜택을 받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리라.

설사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군 면제를 받았다 하더라도 ‘면제자’들이 대통령은 물론 국회의원, 장 차관 등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역겨운 일이다. 징병제가 존속하는 한 최소한 이들 고위직만이라도 반드시 군필자가 선출 또는 임용되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됐으면 한다.


둘째 아이는 이렇게 황금 같은 27개월을 군에서 썩은 뒤 제대했다. 그리고 3학년에 복학해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유능한 경영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회계사 시험 준비를 위해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퇴직 후 어려움에 처하자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어렵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유독 꿈이 컸고, 의욕도 많은 아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세파에 부대낀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테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가슴이 또 울컥 북받쳐 오른다.

‘잠을 자야지’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잠이 더 오지 않았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측하고 있을 즈음, 벨이 울렸다.

새벽 3시, 그물을 올렸다. 역시 주 어종은 참조기 갈치 오징어 새우였다. 선별 작업 후 냉동고에 저장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모처럼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그동안은 배가 고팠으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래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갈치 이빨에 베인 손가락은 쉬 낫지 않고 계속 쓰리고 아프다. 또 갈치 가시가 박힌 손가락도 통통 부어올랐다. 게다가 냉동된 사료용 고기 상자를 들다 미끄러워 놓친 바람에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찧었다. 찍힌 곳이 발톱이어서 통증이 더욱 심했다. 하지만 참고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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