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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돈 까먹으러 왔지 뭐’

<에세이> 늙은 어부의 노래

by sunb

“돈 까먹으러 왔지”라는 말 한마디는 내게 심대한 상처가 됐다.

배를 타려고 작정하면서 ‘죽는 것이 사는 것死卽生’이라 다짐했다.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은 배를 타지 않고선 얻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잠시, 세상(뭍)을 떠나있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세상만사가 다 싫었던 것이다. 백면서생이나 다름없는 내가 배를 탄다는 것, 그 자체가 죽는 것이라고 여겼다. 또 다른 이유로 생각해 본 ‘새로운 경험’ 따윈 너무도 낭만적인 사고였다.

나이 60에 배를 타면서, 더욱이 가장 빡세다는 쌍끌이 저인망 고깃배를 타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충만해 있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내가 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여겼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1년쯤 꾹 참고 ‘배를 타리라’ 각오했다.

‘그런데 이 바다에서조차 나를 받아들이지 못 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에 미치자 내 육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왜 내겐 힘을, 완력을 주지 않았을까. 내게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이 있다면, 적어도 이만기나 강호동 같은 힘만 있어도…’ 하는 절박함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동안 다른 선원들이 힘에 부쳐하는 나를 멸시하는 것을 대할 때마다 몹시도 부끄러웠다. 고기 상자를 들 때마다 ‘내게 힘을 주소서!’를 속으로 외치곤 했다. 그런 나에 대해서 다른 선원들이 많은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일지는 몰랐다.

생각 같아선 배에서 당장 내리고 싶었다. 일이 너무나 고달프기도 하지만, 이들로부터 받는 무시와 멸시가 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은 하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배가 항구에 들어가야만 하선도 할 수 있는 것.

‘그래, 버티는 데까지 한 번 버텨보자. 이 같은 고통이나 수모는 이미 예견했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의 말을 더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들 옆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배 반장이 갑판으로 나와 내게로 다가온다.

“형님,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지들도 잘하지 못하면서, 원래 그렇습니다. 갑시다.

소주나 한잔 하게.”

배 반장이 손을 잡아 이끈다.

나는 그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다. 배 반장은 식당 안쪽 구석에 숨겨져 있던 한되(1.8ℓ) 짜리 소주병을 꺼내와 종이컵에 가득 부어 내게 건넨다. 나는 누가 볼세라 망설이면서도 컵을 받아든다. 그리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짜릿함이라니…, 그것은 내가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오르가슴Orgasm’이었다.

배 반장이 “한 잔 더 하세요.” 하고 권하지만 사양했다. 그러잖아도 밉보인 판에 취기라도 보이면 정말 큰 일이겠기 때문이다. 이 한 잔만으로도 모처럼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다시 없을 소주 한 잔을 마시고, 쥐 죽은 듯이 침상으로 기어들어가 허리를 눕힌 채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일어나 다시 양망하고, 선별을 하고, 또 투망을 한다. 투망이 끝나고, 밴딩 작업이나 냉동고 정리 작업이 없으면 잠시 쉬는 시간이다.

식당에는 TV 수상기가 있다. 위성을 통해 국내 TV 방송의 화상이 더러 잡힌다. 고참들은 늘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하면서 TV를 보곤 했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런 자리에 끼지 못했다. 지나가다 화면에 눈길이 갔는데, 또 태풍이 오고 있다고 한다.

그로부터 우리 배는 다시 피항 준비를 했다. 이번엔 아예 일정을 앞당겨 귀항한다고 했다. 서둘러 그물을 올려 선별 작업을 끝냈다. 상당히 씨알이 굵은 가다랑어와 조기, 갈치 등이 그런대로 잡혔다. 선별 후, 상자에 담은 고기를 급속 냉동고에 넣었다. 나는 갑판에 늘어져 있는 고기 상자를 들어 올려 냉동고 입구까지 가져다 날랐다. 상자를 한 번에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일단 무릎까지 올려 한번 쉰 뒤 다시 아랫배로 올려 배로 받치면서 나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고기 상자를 들고 가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가다랑어 상자였다. 태풍 영향을 받아 배가 크게 흔들리는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넘어지면서도 나는 고기 상자 걱정부터 했다. 상자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낭패였던 것. 고참들의 입살에 오르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고기 상자는 이상이 없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어나 어상자를 가져다주었고, 작업을 계속한다. 그런데 가슴이 심하게 결린다. 넘어지면서 상자에 가슴을 찧은 것이다.

가슴이 아팠으나 아프다는 말을 할 수조차 없다. 일을 다 끝낼 때까지 참고 버티었다. 가까스로 일을 마치고 휴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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