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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덧나는 손가락 상처

<에세이> 늙은 어부의 노래

by sunb

‘막내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찌 지내고 있을까. 돈은 부족하지 않은지···’

아무리 학교에서 출장비가 나온다고는 했지만, 용돈 하라며 단 1달러도 주지 못했던 내가 한심스럽게 여겨진다. 내가 만약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아니 휴대폰만 끊지 않았더라면, 몇 번이고 전화를 해 안부를 전했을 아이. 연락조차 되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또 얼마나 가슴 졸이고 있을까. 생각하노라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러다 정신을 추슬러 옷을 입고 목욕탕을 나와 약국을 찾아간다. 빗속을 걸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분명히 내가 인생을 잘못 살고있는 거야. 보다 현명하지 못하고, 영악스럽지 못하고, 우직하게만 살아온 난 바보 머저리···’

‘일일일생一日一生’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일일일생’은 예로부터 인생을 참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는 의미로, 많은 현인들에 의해 회자돼 온 말이다. 그런데 일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년)가 <一日一生>이라는 책을 내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같은 이름으로 홍성사(안진희 역)에서 발간했고, 2005년 설우사(김유곤 역)에서도 펴냈다.

책 <일일일생>은 간조가 하루하루는 귀한 일생으로, 결코 허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일 기록한 일종의 묵상록이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摸(1890~1981년) 선생도 이에 동조했다. 다석 선생은 “아침에 잠이 깨어 눈을 뜨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잠을 자는 것이 죽는 것”이라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생의 마지막 5분’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늘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살고 있다.”는 것에 자긍심을 가지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일일일생’ 다이 살지 못했다. 단 한 번이라도 하루를 일생이라 여기고 살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매일을 그냥 그리 저리 살아온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말 그대로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는 그 하루 동안 알에서 깨어나 성충이 된다. 그리고 그리도 싫어하는 인간을 피해 다니며 종족 보존을 위한 짝짓기를 한 뒤, 알을 슬어두고 장렬히 죽는다고 한다.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지금까지 60년을 살면서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하는 자괴감으로 눈동자가 흐릿해 왔다.

거리엔 약국이 흔치 않았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약국을 찾아 들어갔다.

“손가락에 상처가 나서 그런데요, 약을 좀 주세요.”

나는 여 약사에게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배를 타야 하기에 적당히 약을 지어달라고 말했다. 약사는 의사 처방전이 없는 내게 소독약인 요오드Jod 액과 가루약, 그리고 진통제와 소염제 알약을 소포장 단위로 준다. 그러면서 5일 정도 복용하란다. 나는 가슴에 붙일 파스도 달라고 했다.

또 갈치 가시가 박힌 손가락을 내밀며 “가시를 빼낼 수 없겠냐?”고 물었다. 약사는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을 살펴보더니 “수술하지 않고선 어렵겠네요.” 하고 말한다.

약국을 나와 마음 편히 쉴만한 곳을 찾는다. 그러나 모텔이나 여관 같은 곳엔 가고 싶지가 않았다. 궁리 끝에 찾아간 곳이 찜질방. 찜질방에 가기 전 부근 식당에서 칼국수로 요기를 하고, 찜질방에서 먹을 포도 한 송이와 바나나 몇 가지를 샀다.

찜질방에 가끔 가본 적은 있으나 잠을 자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평소 아이들이 친구들과 곧잘 찜질방에서 잤다고 했을 때, 그런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있나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찜질방에서 잠을 자려고 하니 수면이 불가능하다. 조명도 있는 데다 여간 소란스럽다. 특히 주위에는 코를 고는 사람도 있어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날이 밝았다. 그러나 잠을 잔 것인지 안 잔 건지, 찌뿌드드한 기분으로 찜질방을 나왔다. 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약봉지를 들고 배로 돌아왔다.

다시 출항. 이미 태풍은 소멸되었고, 바다는 잔잔했다. 그물을 내리기 전까지는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면 되었다.

어디쯤 왔을까.

우리는 다시 그물을 내려야 했다. 선실에서 나와 투망준비를 했다. 태양은 바다 위에 바짝 붙어있다. 갈매기들도 여전히 우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사위는 바다와 하늘뿐. 벌써 공해 가까이에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물을 내리고 올리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더이상 새로울 것도 없고, 신기한 일도 아니었으며, 힘든 일도 아니었다. 이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날짜를 쌓아 가면 되었다. 늘어난 날짜만큼 돈도 늘어난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가져온 약을 먹고, 소독약도 발랐으나 손가락 상처는 아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파스를 붙여도 가슴이 저리는 것은 큰 고통이다.

그럼에도 그물질은 계속해야 한다. 바다에서 그물을 건져 올릴 때마다 어창에는 다시 고기 상자가 쌓여간다. 힘이 들고 고통스러워도 어창에 고기 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선별할 때마다 한 마리라도 더 상품 가치를 인정받게 하기위해 애썼다.

유독 가슴이 결렸던 이 날, 양망 작업이 끝난 시각은 마침 해거름이었다. 태양이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해질녘은 대부분 청명한 때가 없었다. 태양은 하루를 마감하는 게 아쉬워선지 늘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낙조落照. 해가 바다로 떨어지는 순간도 일출의 장관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낙조가 만드는 황혼은 황홀경 그 자체이다. 태양은 하루를 마감하면서 서녘 하늘에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 놓는다.

인생의 말년을 황혼이라 하지만, 태양이 만드는 저 황혼에 비할 바가 있을까. 오래 전 한 노老 정객이 정치판을 떠나면서 “황혼에 물든 저 서쪽 하늘처럼 인생을 물들이겠다.”는 말을 해 언론에 회자됐다. 우리 인생의 황혼이, 태양이 만든 저 황혼처럼 찬란하고 아름답다면 오죽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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