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량하지 않다. 외롭지 않다. 그저 맘 터 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을 뿐이다.
원래부터 없었다. 말이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만나는 이들 마다 자신의 말을 할 뿐이지 내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아 마음을 닫았다. 지금도 닫고 내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게 하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고 약간의 분석과 조언이 있으면 다들 좋아했다.
그렇다고 난 아싸가 아니였다. 그런대로 인싸였다. 친구가 없는 데 어떻게 인사이드냐고?
잘 들어주고 하니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성격도 모나지 않고 동굴동굴해서 좋았다. 그러나 정작 난 어린이였을 때는 군중 속에 외로움을 느꼈다.
부모님도 내 이야기 듣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보여서 입을 다물었다. 학창시절 때 내 이야기 보다 관찰한 내 주변 아이들 이야기 했다. 바로 캐치해서 내 이야기를 하라고 하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자세로 엄마는 집안 일을 하셔서 마음을 더욱 닫았다.
그랬더니 우울증이 왔다. 좀 심하게 왔다. 워낙 사람들에게 공격도 많이 당해서. 허언증 여자들 때문에 그렇다. 다 나랑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나를 콕 집어서 안다면서 헛소리를 해서 그 피해를 입었다. 그 헛소리를 들은 남자들이나 힘 깨나 쓴다는 여자들이 찾아와서 큰소리로 싸우려 들었다. 그러나 난 주눅 들지 않는다. 왜? 내가 모르는 소리 하는 정신질환자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맞서 싸우면 상대방이 의아해했다. 그리고 역으로 허언증 여자들을 찾아가서 오히려 그 여자들을 혼 줄을 내주었다. 그래서 여기서 얻은 교훈은 …..
“거짓으로 진실을 가를 수 없다!”
라는 격언을 몸소 느끼고 체험을 하고 지금도 유용한 격언이다.
그래서 싸우자 하는 사람에게 강하게 나간다. 내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강해야 했다. 그러지 않음 난 지금의 내가 없다. 좀 더 어릴 때는 이렇게 강하게 맞서는 게 마음 한 구석이 여려서 후회와 자책이 와서 심하게 우울증이 왔다. 그래도 학창시절엔 사람을 믿었다. 깊이는 믿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실망도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사람을 믿지 않게 된 계기가 있었다.
대학을 다닐 때였다. 1학년 끝내고 막 2학년이 되려 할 때 중학교 동창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냈어? 나 OOO야. 어떻게 지내?”
냉큼 누군 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기억이 났다. 간단한 첫 통화를 마치고 자취집으로 향했다. 이 때 1학년 2학기가 막 끝난 겨울이 였다. 틈틈이 연락을 동창이 먼저 취하다가 대뜸
“서울에 알바 자리 있는데 나랑 같이 하지 않을래?”
이런 소리에 서울이라는 곳을 제대로 체험해 보고 싶어서 냉큼 응했다. 집에다 말을 했더니 반대가 심했다. 이 땐 그러거나 말거나. 서로 떨어져 지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친구 따라 서울 강남을 향했다. 송파구 마장동이 였다. 아, 지금 보면 거마동이라고 거여동과 마장동에 다단계 불법?기업들이 모여 있어 대학생들을 꼬셔내는 그만큼 어린 어른들이 있다고 사회적 문제라고 TV시사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있다. 내가 20여년 전에 거길 다녀온 거다.
고불고불…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동창 따라 갔다. 길을 외울 수 없게 돌아가는 느낌이였다. 어찌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
“돌아가는 거 아니야? 서울에 이런 촌구석이 있을 줄 몰랐어.”
내가 말했다. 1학년 때 서울이라는 대도시이자 수도를 알게 된 이후, 서울의 화려함만 보다가 판자촌은 아니지만 시골스런 풍경에 실망한 건 맞다.
“뭐 이런데도 있어.”
무조건 따라오라고. 그래…. 나 서울에 대해서 까막눈이야. 동창 따라 갈 수밖에 없다.
이 동창하고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서로 얼굴만 대면대면했을 뿐인데 대뜸 친한 척하고 다가오니 이 때 어린 마음에 의심을 하지 않고 반겼다. 지금 40대가 되고 나서는 꽤 사람을 만나고 속고 하니 사람 가리는 습관이 생겼다. 대체적으로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달까.
친구따라 강남을 가서 희안하게도 업무 배치가 아니라 강연을 들으라는 거였다. 면접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긴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 한 20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간 속의 의자에 앉아 강의를 들었다.
들을수록…. 내가 잘 못 왔다는 걸 깨 달았다. 한마디로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사람을 꼬시는 그런 기업….. 사회에서 불법이라고 규정 지은 다단계였다. 젠장…. 동창이 다단계에 내가 부자스러워서 데리고 온 건가? 라는 ‘부자’착각에 잠깐 빠지자 배신감이 물 밀 듯 마음을 부수었다.
잠도 재우지 않고-지네도 못 잔다.- 게임이랍시고 너무 팔이 휠 정도로 벌칙수행을 했다. 음식은 마트의 시식코너에서 해결하고. 와…. 이런 데가 좋다고 동창은 왜 여기 있는거지? 공동생활을 해서 내가 적응이 안되었다. 사실 난 기숙사생활도 못한다. 여러 사람하고 지내는 걸 매우 불편해 한다. 그런곳에 있으니 내가 거기 있는 동안 꼬박 밤샌거나 마찬가지다.
결국…… 그 동창은 가면을 벗고 자신이 내 상사라며 이제 나보고 식대며 생활용품을 내란다. 공동생활이니 내가 나랑 지내는 사람들의 생활비 정도는 줘야 한다면서. 뗑~~~ 머리 속에서 종이 쳤다. 정말 열악했다. 비누도 20명이 돌아가며 쓰고, 남녀 혼용이라 참…… 이런 데서 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한다고? 거기에 곁에서 보니 이 중학동창은 생활이 어렵다는 데 부모에게 500만원을 뜯어 내는 거 보니 정신이 나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도 이 정도 뜯어 내라는 거 불쌍해서 50만원 너네 쓰라는 식으로 돈 받아서 생필품 사서 주고, 동창의 상사라는 다이아몬드와 한 판 떠서- 내가 말 발이 엄청 세서 말 싸움에서 진 적이 없다.- 다단계기업에서 깨끗하게 나올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참 질척이며 주변을 맴 돌며 계속 끌여 들일려고 했을 텐데. 포르셰 타고 내가 사는 곳으로 온다고 호언하면서 나를 놔줬다.
그 후 20년이 지나 정말 우연히 이 동창을 어느 병원의 자원봉사를 하는 곳에서 보게 되었다. 이 동창….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데 그녀의 죄일까…. 아이가 팔에 링겔을 꽂고 돌아다니면서 웃는다. 동화책을 빌리려 왔었다. 난 단 박에 동창을 알아봤으나 그녀는 나를 못 알아봤다. 목소리나 말투를 잊은 듯했다. 그래서 그냥 모르는 척하고 찬찬히 그녀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가정의 경제가 좋지 않은 지 옷이 허름했다. 어떤 남자랑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병원신세를 짓고 있는 걸까. 포르셰 타고 내 앞에 나타난다더니 아픈 아이를 데리고 수척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나타난 거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포르셰를 몰고 나타난다더니…… 수척하고 힘든 모습이니?’
20대보다 더 건강하게 바뀐 나를 알아보지 못한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왔던 길로 다시 갔다.
기분이 묘했다.
이 동창 때문에 사람에게 뒤통수를 첫 맞은 거라 마음을 크게 다쳐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먼저 의심부터 하고 사람을 가려보려고 따진다. 다시는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그래서 친구가 없어도 사람은 어딜가나 다 있기에 외롭지 않다. 평생 마음을 터 놓고 지낸 사람이 없어 오히려 마음 터 놓는 게 어색할 지경이다.
그러므로 난 아싸여도 상관없이 내 인생 잘 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