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다 자신만의 명제?, 신조?가 있을까?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문장들이 있다. 그 명제들을 이제 한 번 풀어보려 한다.
나는 희한하게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이 역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이 된 거 같다. 이땐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아서 였다. 커가면서 모함이 많아졌다. 나를 알지도 못하고, 좀 내가 속내를 조금만 들어내도 그 점을 이용해서 참 많은 사람에게 고초를 당했다.
나는 근데 그냥 당하지 않는다. 난 당한 만큼 돌려주는 당돌함이 있다. 다 큰 지금도 그 당돌함은 여전하고 기백이 있다는 말도 듣는다. 즉, “건들면 죽인다.” 다.
괴롭히지 않고 평범하게 살게 되면 순딩순딩하게 잘 웃어주며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착한 사람이다. 그러나 괴롭히고 정말 죽음으로까지 몰아갈 정도로 심하게 두들긴 적이 많았다. 그럴 때… 난 변신을 하는지 더 강해진다. 가해자를 죽이지 않고 피해자인 내가 물러설 수 없다. 내가 가해자를 처단하지 않으면 나 같은 피해자가 제2, 제3 더 속출하지 않냐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또 숨어 있는 가해자를 찾는 와중에 나 같이 타겟이 되어서 피해자가 되어 울면서 불명예롭게 조직을 뛰쳐나간 이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럴 때마다 그 고리를 끊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건들면 죽인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추적해서 가해자를 찾고 처단한다. 나홀로 고군분투하니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난 그걸 절대 뿌리치지 않는다. 조직과 개인이 싸우는 거기에 개인인 나 혼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가해 집단을 어쩌지 못하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절대 뿌리치지 않는다. 도움의 손길의 도움으로 가해 조직을 절단낸다. 그러면 그제야 나의 무서움이 퍼진다.
그리고 또 옮기면 같은 괴롭힘이 반복이 된다. 다른 인물, 다른 상황, 다른 환경인데 왜 이러는지 지겨웠다. 같은 방법으로 또다시 같은 작업을 한다. 주변의 도움의 손길도 어김없이 온다. 나라는 사람만 동일하지 다 다른 데 어찌, 때리는 양상은 언제나 가해 조직 대 피해자 개인인지 모르겠다. 타겟이 왜 내가 되는 지도 의문스럽고. 내 소문을 못 들어서 까분다 생각하지만 지겹고 지쳐가는 건 나이 탓일까?
사회 나와서는 넘사벽의 실적을 내서 나를 경계하는 이들이 많아서 그런 건가 싶었다. 정말 넘사벽의 실적을 해냈다. 근데 시기질투하는 사람이 많은 지 평생 당했던 괴롭힘이 나왔고 나는 익숙해 진대로 진두지휘도 하면서 조직을 동강내고 소문도 잠재운다.
사람들은 소문을 낼 줄 알지 나처럼 소문을 없애는 일을 못한다고 한다. 소문을 잠재우는 법을 사람마다 터득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터득 못하고 음해하는 자도 많다. 천성이 악하게 태어나서 일거다. 이런 사람은. 이런 신념으로 난 싸워 이긴다.
또다른 나를 일으켜 세우고 정직하게 살게 하는 것은 바로…. “과거의 내 자신을 만날 때 자랑스럽게 내 인생을 말할 수 있는 상태로 가는 것”이다.
이 명제는 어릴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아픈 질환이 낫고 나서 생겼다.
아주 다 나은 건 아니지만 15년전의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 나와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다르다. 내 자신이 질환을 이기려 노력하고 완치에 가깝게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의 나에게 잘 살았다고 나중에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이 들었다. 즉, 함부로 삶을 망치며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함부로 목숨을 끊지 않겠다는 또다른 다짐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주치의가 완전히 나은 건 아니지만 정상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함부로 정상이다 말하지 말랬지만 듣는 질환자는 기분은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치의가 지금까지 우울증이 너무 심했는데 어떤 신념이 나를 이끄냐고 물었을 때 의사는 울었다.
바로 위의 말을 했을 때 자신도 느끼는 게 있는지 남자의사인데 울더라고. 자신도 과거의 자신을 잊고 살았단다. 지금의 의사로 있게 해 준 과거의 자신을 생각해서 현재,미래에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내가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그러며 “대단하세요”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나도 이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기도 한다. 내 과거에 한 점의 부끄럼 없이 인생을 살아가기. 이게 또다른 나를 일으키는 명제다.
그리고 나에겐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누구냐고? 애인이냐고? 아이냐고? 아니, 다름아닌 남동생이다. 남동생은 자폐증을 앓는 장애인이다. 2살 때 발현해서 6살쯤 알게 되었다. 다행이 엄마 닮아 정리 잘하고 꼼꼼이라 덜렁대고 정리가 안 되는 내가 보살핌을 오히려 받는다. 남들 이런 말을 하면 믿지 않는다. 이건 성격 차이니까.
누구든 남동생을 건드리면 …… 첫 신념처럼 가만 두지 않았다. 대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그래도 남동생이라 남자가 아닌 나는 지키는 데 한계가 있어 남들 보지 않는 데서 많이도 울었다. 남중학교에 남동생이 다닐 때 다른 학우들에게 꼬집히고 맞은 흔적을 봤을 때 정말 눈 돌아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여자니까. 힘이 세지는 중학생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이럴 땐 내가 여자라는 점이 한스러웠다.
내 동생은 자폐 아동에서 자폐 어른이 되었다. 중증 자폐인데도 손이 야무지고 성격도 나쁘지는 않아서 장애인 보호작업장에 22년째 다니고 있다. 단기근로계약서를 매년 마다 계약을 하면서 다닌다. 그래서 지금 나보다 돈을 잘 번다. 그래서 한 때 장애인 동생보다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도 잠시 갖기도 했다.
근데 내가 아픈 걸 눈치 챈 동생은 이제 일하지 말고 집에 박혀 있으라 한다. 오히려 자폐어른인 동생의 보살핌을 받는 기분이 들긴 한다. 자신이 보살펴 주고 싶다는 말을 잘 못해도 그 마음이 느껴진다. 아이….. 눈물이 조금 나지만 참아야지.
이렇게 이 세 신조가 나를 지금에 이르게 했다. 여전히 변함은 없을 것이며 심한 우울증에도 자살을 하지 않고 버티게 한 내 생각들이다. 어느 누가 주입시킨 게 아니다. 내가 스스로 깨닫고 경험으로 터득한 신조들이다. 이 세가지 신조로 지금을 살아 갈 것이며 앞으로도 더 잘 살아 갈 것인 즉, 나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