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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Jun 24. 2024

아버지의 한 줄, 나의 한 페이지

‘교육의 역사와 철학’, ‘교육과 사회’, ‘교육의 사회학적 이해’, ‘교육사상사’, ‘마르크스의 철학’,‘마르크스의 자본론’. 아빠 책장에는 비슷한 책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서 가로로 다시 책을 눕혀서 올렸다. 많고 많은 책 중에 내가 보고 싶은 건 없었다. 제목도 내용도 고루하고 지루할 게 뻔했다. 소설, 수필 한 권 없는 아빠의 책장은 보기만 해도 갑갑했다. 


어릴 적, 이사할 때마다 엄마에게 가장 골칫거리는 수백 권의 책이었다. 포장 이사가 없었던 시절, 책을 빨간 노끈으로 묶고 상자에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이사를 기회 삼아 싹 버리고 싶어 했다. 처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아빠의 눈치를 보며 책을 상자에 넣었다. 아빠는 엄마의 마음을 짐짓 모른 척하며 상자를 이삿짐에 실어버렸다. 버리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아빠의 의지였다. 어린 나이의 나는 묘한 갈등의 분위기를 느꼈다. ‘다 비슷해 보이는데 최근 것만 남기면 안 되나? 책 팔면 돈이 될까? 저건 언제 다 읽지?’ 아빠의 큰 키와 넓은 어깨처럼 책장도 나에게는 다가가기 힘든 대상이었다.


사춘기 소녀가 되었을 때, 책을 보며 생각했다. ‘저렇게 많은 책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야? 책을 쓴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 집에서 교육이 이뤄지지 않는데…….’ 엄격하고 무뚝뚝한 교육학자 아빠와 사춘기 시절을 통과 중이었던 나는 자꾸 부딪혔다. 가족들은 아빠에게 ‘책만 읽는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아빠는 묵묵히 새벽마다 읽고 썼다. 나와 동생이 아침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면서 당신과 같이 공부하길 원했다. 아빠의 바람을 모르는 척했다. 아니, 들어줄 수 없었다. 우린 그쪽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빠를 답답하게 생각했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동생과 나는 2주간 매일 서가를 정리했다. 책을 재활용품으로 분리하여 마구 버렸다. 아빠의 공간을 깨끗이 정리하는 일은 실로 힘든 일이었다. 이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다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책 같은 건 사지도 모으지도 말아야지.’ 책에 남긴 밑줄과 메모, 부치려다 만 엽서, 젊은 시절의 사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일기장이 나올 때마다 아빠의 지난날이 떠올랐다. 공부하기 어려웠던 가난한 시절의 어려움, 농사 대신 학업을 선택해 할머니와 갈등한 일, 일찍 돌아가셨던 할아버지 대신 집안을 일으켜야 했던 장남의 고민, 아내와 자식을 한국에 두고 유학길에 오르게 했던 인생 목표가 책장에 흔적을 남겼다. 결국, 아빠는 교수라는 꿈을 이루었고, 글을 더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집필했던 책을 제외하고 모두 수레와 자루에 담아 재활용품 쓰레기장으로 옮겼다. 책은 어떤 식으로 버려도 참 무거웠다. 책 자체가 주는 무게에 아빠 인생까지 얹어져 책꽂이를 비우는 일은 힘겨웠다. 모두 버려도 아빠의 일기장은 버릴 수 없었다. 아빠의 즐겁고도 고단한 하루가, 늙어감에 대한 공허함이, 죽기 전 마지막까지 자식에게 부담 주기 싫었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빠의 2020년, 2021년 일기 중 일부>     

2020. 1. 11.

목욕탕 사장님 말에 의하면 노인 한 분이 탕 안에서 정신을 잃고 응급실에 급히 실려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목욕탕 안에서 오래 몸 담그고 있지 말라며 목욕탕 내 이발사 – 나이 제법 지긋한 분인데-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특히, 기온이 급격히 낮아지고 체온이 떨어지는 겨울철에 뇌경색, 뇌졸중 환자가 많이 발생한다니. 참으로 몸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020. 1. 24.

심곡천 길을 걸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제법 큰 소나무 위 까치집을 보았다. 시골에서는 쉽게 볼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희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어젯밤 꿈에 할머니가 생전 모습의 차림새로 오셨다. 그 순간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2020. 3. 2. 

각급 학교 개학이 연기되었다.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윤정이는 출근해야 하는데, 처가 열이 올라 손자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학교에 늦게 간 것 같다. 신경이 쓰인다. 나라도 가서 손자들과 놀다가 올 것을 하고 뒤늦은 후회도 해본다. 나 역시 요사이 허리도 아프면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자꾸 짜증이 나고 나 자신한테 화풀이하는 날이 부쩍 늘고 있다.    

 

2020. 3. 5. 

절기상 경칩이다. 땅속의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도 날씨가 따뜻해지니 봄볕을 쬐러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날이다. 또한, 조부모 제삿날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 계실 적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큰손자라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대구에서 대학을 다닐 적에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였고, 졸업 후 첫 직장인 ‘울산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도 할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으며 함께 생활했다.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나의 몸과 정신이 성장하고 성숙하였으니 오늘따라 할머니가 그립다.      


2020. 3. 19.

오늘은 강풍주의보가 있었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종일 집안에만 있었다. 자연에 의한 아름다운 연금 상태이다.  

   

2020. 3. 28.

따스한 봄기운에 개나리, 목련이 활짝 피었다. 꽃들이 이 봄을 더욱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봄날이 왔건만 내 마음은 어쩐지 허전함과 공허함, 온갖 회한이 밀려온다. 끝없는 사막길을 혼자 걷는 유랑자의 모습이 내 처지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2020. 5. 15.

간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오늘도 산책하지 못하였다. 집콕 신세. 스승의 날, 학교에 있을 적에는 행사가 있어서 즐거운 하루가 되었건만. 벌써 퇴직 14년 차. 옛 추억으로 남아있다.    

  

2021. 4. 15. 

오늘은 인천으로 이사 온 후 두 번째 죽음의 문턱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일이 있었다. 오전 심곡천 길을 걷고 있는데 자전거 탄 사람이 나의 몸을 덮쳤다. 의식을 잃었다. 구급차, 경찰차가 출동하여 국제성모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머리봉합 수술을 받았다. 악몽 같은 하루였다.  

    

2021. 4. 18. 

머리 상처 부위를 처가 소독하였다. 오늘은 더욱이 기력이 떨어져서인지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싫었다. 거실 의자에 누워서 TV 시청이 고작이다. 오후엔 족욕하고.     


2021. 5. 4. 

수원이가 전화 와서 처 입원 절차 마쳤다고. 오후 늦은 시각에 순천향병원에 입원 중인 처가 전화하였다. 조직검사 받았고, 결과에 따라 암 수술 여부가 결정된다고 했다. 수원이가 또 전화했다. 누나 집에 가 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나는 아니다. 나는 안 간다고 말하였다. 


아빠도 나이가 들면서 책을 보는 시간이 줄었다. 책보다는 TV, 글 속에 담긴 지식보다는 언론이 알려주는 건강정보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만년필로 문장을 옮겨적는 일도 하지 않았다. 글자가 눈에 보이지 않고, 앉아서 집중하는 일이 힘들었을 터이다. 2021년 5월 5일, 죽는 그 날까지 놓지 않았던 일은 오로지 아빠의 하루를 기록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일기가 5월 4일에 멈춰 있어서 아빠의 기일을 정할 수 있었다. 일기장이 없었으면, 아빠가 홀로 쓸쓸히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시간을 알기 어려울 뻔했다. 내가 이 세상의 몸이 아닌 아빠를 보고 주저앉았던 5월 7일이 사망일이라고 여기며 지내지 않았을까? 나는 아빠보다 쓰고 읽는 일에 대한 애착을 두지 않는다. 물론, 끈기도 없다. 책만 보느라 우리에게 살갑지 않은 아빠를 원망하던 딸이었다. 심지어는 책은 전자책으로만 보겠다고 다짐했던 나였다. 그런 내가 동네 책방을 열었다. 가끔 글도 끄적인다. 내가 공부하며 찌푸리던 아빠의 미간만 닮은 게 아니었나 보다. 아빠 삶의 필적이 내 안에 쌓였다. 이제 아빠의 책장은 내가 보고 싶은 책으로 가득 찼다. 아빠가 없는 세상은 슬프지만 남은 자들은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책장을 쓸고 닦는 일이 내 밥벌이다. 죽은 자의 책장은 내게로 와서 오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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