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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니버서리 Mar 15. 2024

보이지 않는 폭력도 있다

믿음으로 만든 감옥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폭력도 있다. 멍자국과 핏자국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폭력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호수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고유한 빛을 꺼뜨릴 수도 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생존자다. 존재의 소멸 직전에 가까스로 스스로를 구해냈다.


그 보이지 않는 폭력은 실제로 잘 안 보인다. 나는 그래서 오랫동안 그것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달콤한 사랑의 언어로 둔갑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 말들을 미련할 정도로 굳게 믿었다. 그래서 자꾸만 혼란스럽고 헷갈렸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은 강철로 된 감옥이 되어 스스로를 가두고 밖으로 나갈 꿈조차 거세했다. 그렇게 나는 믿음이라는 숭고한 재료로 만든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감치 되었다. 




그의 폭력은 아주 정교하게도 매번 적 경계 바로 직전에서 멈추었다. 배드민턴 경기 중 상대편 코트 라인의 경계선에 정확히 떨어진 셔틀콕처럼 VAR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대체 무엇인지 판단하는데 오래 걸렸던 것 같다.


이를 테면, '조수석에 태우고 과속하기' 같은 것이.  버스가 역과 하는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 본 내게 그는 가장 가성비 좋은 처벌로 과속운전을 택했다. 뱃속에 아이가 있었다. 나의 공포가 태아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배가 돌덩이처럼 뭉치고 내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손 한 번 안 대고도 나를 학대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두려워졌다. 그의 의견과 다른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점점 더 부담스러운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어 갔다.


그는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건드려지면 불같이 화를 냈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수틀리면 내 탓을 하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구정물을 내 얼굴에 쏟아부었다. 나는 그때마다 그 감정의 쓰나미에 맥없이 휩쓸려 몇 번이고 죽었다. 왜 나한테 그러느냐고 따져본 적도 있고, 아이 앞에서만이라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읍소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너 때문에' 내가 열받아서 그런 거다. 화나는데 뭐가 보이겠냐.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라.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침묵하는 편을 택했다. '나만 그에게 잘 맞추면 괜찮지 않을까? 아이가 있으니 참고 살아야지...... 다들 맞춰가며 사는 거라잖아.' 하며 억지로 합리화했다. 자꾸만 속이 허했다. 그렇게 내 마음의 소리는 틀어막고 사는 시간이 하루하루 거듭될수록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한 모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뱃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24시간의 가진통과 8시간의 진통 후 건강하게 태어났다. 새로 내게 주어진 '엄마'라는 역할을 잘 해내고 싶었다. 아이가 너무 예뻤다. 찹쌀떡 같이 뽀얗고 찰기 있는 살, 쌍꺼풀 없이 깊은 눈, 귀여운 입모양까지 내가 그려왔던 모든 것을 가진 아이였다. 나를 꼭 닮은 이 아이에게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나만 괜찮은 척하면 될 것도 같았다.


한 차례 푸닥거리를 하고 남편 기분이 풀리면 며칠은 평화가 찾아왔다. 그가 기분이 좋을 때는 연애시절처럼 순한 얼굴로 돌아왔다. 애교 섞인 말들로 사랑을 말했고, 나는 또 그걸 믿었다. 처음에는 대략 석 달에 한 번 꼴로 그러더니, 빈도가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별의별 이유로 나를 괴롭혔다.


한 번은 XX전자 고객사은대잔치에 갔다가 판매원이 자기를 무시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는 것이 트리거(trigger)가 된 적도 있었다. 넓은 매장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를 그가 완력으로 둘러업고 강제로 카시트에 태우더니 거칠게 차를 몰았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분노로 뒤범벅된 남편의 폭언을 집에 오는 차 안에 갇힌 채 들어야 했다. 왜냐면 내가 괜히 거길 가보자고 했기 때문에. 또 '나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방 안'이나 '차 안'에서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세상 사람 좋은 얼굴을 했다. 우리 식구들은 물론 자기 가족들 앞에서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누가 봐도 편안하게 웃는 얼굴로 방금 부모님과 인사 해놓고는 차가 출발하자마자 낯빛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도착할 때까지 시댁에 있는 동안 거슬렸던 것들에 대한 온갖 비난의 말들을 쏟아냈다. 아이가 듣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생물학적 친부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아빠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진정 아이를 위한 일이 맞는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폭력의 강도도 점점 세졌다. 목소리가 커지고 손이 오르내렸다. 결국 물건을 던져 부수었다. 젖병소독기가 떨어지면서 그 안에서 소독 중이던 젖병의 부속들이 누군가의 장기처럼 튀어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누군가 남편이 직접 때린 건 아니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나도 이 모든 것이 폭력이라는 걸 변호사를 만나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냥 화가 많이 나서 한 우발적 행동일 뿐, 그는 나와 아이를 사랑한다고 지독히도 굳게 믿었다.


남편이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냐는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의 물음에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물건을 던지거나 부순 적은요?" "젖병소독기를 던져서 고장 난 적이 있긴 한데, 제가 맞은 건 아니에요." 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물건을 던지는 것도 폭력입니다. 다음에 던지는 건 젖병소독기가 아닐 수도 있어요." 


나는 이렇게 둔했다. 그랬기에 신혼 초부터 이미 시작된 크고 작은 폭력을 4년이나 몰랐다. 아니 모르고 싶어 부정하고 스스로 눈을 가렸다. 애 키우면서 다들 한 번씩 다투고 그러는 거지, 남자가 화나면 소리도 지르고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내가 나를 방어하고 보호하지 못하자 그는 점점 더 잔인해졌다. 내 앞에서 친정 부모님을 비아냥거렸다. 정말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다툼이 잦아졌다. 그러면 또 그 핑계로 육아와 집안일은 오롯이 내 몫으로 던져졌다. 냉전 중이라는 것을 방패 삼아 퇴근 후 씻고 안방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꼭 닫고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아이가 울든 말든 남편은 모든 역할에 파업을 선언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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