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른 일을 하거나 아프거나 휴식을 가지려면 누군가 그 시간 동안 내 몫을 대신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애엄마는 마음 놓고 아플 수도, 마음 편하게 쉴 수도 없다. 아이를 둘이 키우는 양부모 가정에서는 그래도 그 손이 하나 더 있다. 얼마나 쓸모 있냐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 자체로 부담은 덜어진다. 물론 이건 개별 가정마다 사정이 천지차이다.
아이를 혼자 키우면 결국 그 한쪽의 빈자리를 조부모가 채우게 된다. 특히 아이엄마의 엄마인 '할머니'가 반강제로 육아의 세계로 소환된다. 어쩌면 남자들에게 재입대를 하라는 명령 같다. 예순이 넘어서도 군대 다시 가는 꿈을 악몽으로 꾼다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이것이 얼마나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소식인지 실감 난다.
그런데도 할머니들은 당신 딸들의 고충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강제징집에 말없이 끌려오신다. 친구들은 은퇴하고 해외로 골프를 치러 다니는 시기에 다시 갓난쟁이들의 양육자가 되는 거다. 당장 종종거리는 딸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다. 할머니도 엄마이기 때문에.
"대체 엄마라는 건 뭘까?"
대관절 그 이름에는 무슨 기구한 사연이 있어 자기 몸과 마음이 갈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나서게 되는 걸까.
60대 중반. 군인으로 치면 벌써 퇴역장군으로 명예롭게 은퇴하여 전우회에서 대접받으며 지낼 나이에 현역으로 재입대를 하라면 할 수 있겠는가? 총칼을 들이대고 겁을 주어도 에라 차라리 지금 죽으련다 할지도 모르는 나이다. 그런데 자식이 눈에 밟히는 할머니들은 한숨 한 번 푹 내쉴 뿐, 말없이 개구리 군복을 다시 꺼내 입고 시꺼먼 군화에 발을 욱여넣는다. 총성 대신 아이 울음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하는 육아 전쟁터로 복귀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숭고한 참전이어도 이놈의 딸들은 대단히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일단 자기 살기가 급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젖병이 날아다니고 바닥에 기저귀가 나뒹구는 전쟁터에서 이미 정신이 가출해 버린 딸들은 매정하게도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다는 듯 강요한다. 얄밉게도 '내리사랑'이라는 말로 도망쳐버린다. 나도 그랬다.
솔직히 나이 든 엄마를 황혼육아의 세계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죄책감을 동반한다. 나처럼 이혼으로 인한 경우 그 죄의식은 갑절로 무거워진다. 솔직히 이혼초년생 시절의 나는 하루하루가 생존게임 같았다. 정신적으로 엄마에 대한 죄책감까지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아예 그쪽을 보지 않았다. 일단은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 이기적이라면 철저히 이기적이었다. 현실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근력이 버틸 수 있는 깜냥을 넘어가는 무거운 바윗덩이를 위태롭게 들고 있는 상태였다. 도저히 여기에 엄마에 대한 죄책감까지 얹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최근에서야 이런 내 마음을 엄마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엄마도 너무나 쌀쌀맞고 당연하다는 듯했던 내 태도에 상처를 많이 받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통했다. 그 밤 안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엄마와 나는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혼은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이혼 후의 삶을 받아들이는 적응기에 나는 엄마의 몸과 마음을 더 아프게 할퀴었다. 괴로운 현실에 대한 분노가 삐뚤게 나갔다. 만만한 게 엄마였다. 그렇게 서로 몇 마디 말로 상처를 후벼 파며 등을 돌리고 지낸 시기도 있었는데, 이번에 침대에 누워 이야기하면서 알았다. 엄마와 내가 서로 마음에서 멀어졌던 그 시기에 우리는 둘 다 죽음을 떠올렸을 정도로 철저히 외롭고 힘들었다는 것을.
결국 나는 깨달았다. 우리에게 얼마나 서로가 필요한지.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를. 닮은 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은 엄마와 나는 모른 척 남처럼 살 수 없다. 그러면 둘 다 불행해진다. 뭐 그렇다고 부둥켜안고 살 수도 없다. 그러면 또 싸운다. 그것이 엄마와 딸의 묘한 애증의 관계이다.
나는 우리 집에서 아이와 살고, 엄마는 엄마집에서 아빠랑 산다. 나는 40대를 엄마는 60대를 지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 삶의 공간과 인생의 시간에서 살아갈 거다. 그저 살다가 가끔 만나 느낀 것들을 나누고 공감하고 때로 서로 토닥이며 남은 시간을 같이 걸어가고 싶다. 이제는 딸이라기보다 친구로, 동지로.
엄마가 이 글을 보실지는 모르겠다. (엄마는 아직 내 글을 보지 못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늘 이야기했던 대로 내가 여전히 엄마에게 '태양 같은 딸'이라면, 엄마는 내게 '달 같은 엄마'라고 말하고 싶다. 보름마다 차오르고 다시 그믐을 향해 가기도 하지만 늘 그곳에서 한결같이 은은한 빛으로 나를 비추고 있었음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엄마에게 세상이 달라 보이는 기쁨을 선사하며 태어난 첫째 아이는 지금 태양처럼 화려하게 빛나지는 못해도 예쁜 별 정도는 될 수 있을 거라고. 아니, 해도 달도 별도 말고 그냥 '나'로 살겠노라고.
엄마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K-장녀는 이제 많이 단단해져서 뭐 무엇이 꼭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나 자신으로 살면 되는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
이렇게 진지하게 고백해 놓고도 다음 주면 또 무슨 일로 지지고 볶을지도 모르는 요지경 모녀사이지만, 그래도 이 글을 쓰는 오늘만큼은 용기 내서 말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