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을 찾아 불행의 길 앞에서 엄청난 리스크를 감당하며 진로를 바꾸었다. 그냥 나이브하게 '아 이제 거기서 벗어났으니 가만히 있어도 행복해지겠지' 하는 낭만적인 기대는 없다.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결정하고 선언했다. 그 말은 단순히 생각회로를 긍정적으로 돌려서 낙천적으로 인생을 바라보겠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무엇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지적극적으로 찾고 느끼고 분석하여그렇게 살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알맞은 환경을 적극적으로만들어주겠다는 의미이다.
나는 주변의 소음, 빛, 냄새와 습도 같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회사에서도 같은 사무실에 너무 목소리가 큰 직원이 있거나 부서원들 간에 다툼이나 긴장관계가 보이면 나랑 직접 상관이 없는 일이어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외부 자극을 감당하느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하는 바람에 쉽게 지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내가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민감도를 낮추어 덜 듣고 덜 보고 덜 느끼려고 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예전보다 한결 둔감해졌다. 일종의 사회화.
여하튼 간에내가 파악한 나란 인간은 주변환경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 없는 인간이다.그래서 고심 끝에 찾아낸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방법은 바로,행복한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예전에는 막연하게 삶에 큰 어려움이 없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세상에도 도움이 되면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말하자면 '자아실현'과 '사회기여' 여덟 글자로 요약할 수 있는 심플한 행복관이었다. 지금 보니 초중고 교육과정을 통해 내 뇌에 반복적으로 입력된 훌륭한 현대시민의 프로토타입 아닌가 싶다.
마흔 즈음이 된 지금도 내게 행복이 뭐냐고 물으면 선뜻 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알겠는 건, 훌륭한 현대시민이 되는 길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과서는 이제 그만 덮을 때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나만의 행복관을 새로이 정립해야겠다. 글을 쓰며 발견한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자기다움을 찾는 것이 행복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내 주변에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점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 자기 몫의 어려움을 징징대지 않고 감당하며 타인도 그러리라는 것을 말없이 긍정한다. 행복할 줄 아는 이들, 행복해지는 법을 간파한 이들 같다. 그들은 타인의 아픔을 굳이 캐묻지 않는다. 몇 마디 말로도 이심전심이 되고, 말하고자 하면 들어주지만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대로 존중한다. 그래서 이들과 가깝게 지내면 나도 행복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것 같다.
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재 자체로 존중해 준다.내가 일이 잘 풀릴 때나 안 풀릴 때나 한결같다. 그런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참 마음이 편안하다. 눈치 볼 일이 없이 내 모습 그대로 괜찮은 거다.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은 휴가를 내서라도 찾아간다. 그 만한 가치가 있다. 먼 길을 다녀와도 좋은 에너지와 따뜻한 마음을 받아와서 피로하지 않다. 내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셋, 세상의 잣대로 나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자기 기억 속의 나를 믿고 지지한다. 내가 이혼을 했든 사기를 당했든 애초에 그런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자기가 봐 온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멋진 아이'라고 말해준다. 묵묵히 진솔한 믿음을 보내준다.
이런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나는 이미 행복하다.
앞으로도 행복할 줄 아는 이들 곁에서 좋은 감정과 따스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점점 더 행복해질 것이다. 거의 반백년(?)의 경험 데이터를 분석해 얻은 결론이므로 99.99% 행복해질 것이 틀림없다. 행복도 복리라 시간의 수레바퀴가 돌면 곱절로 커져서 몇 년 뒤엔 나도 누군가에게내가 받은 마음을 돌려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