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응…, 끄응….”
신음 소리가 난다. 연신 가느다랗고 애달픈 신음 소리가 한 시간을 넘게 내 귀를 쟁쟁 울린다. 강아지에게서 저런 소리가 나는 것을 처음 들었다. 개가 짖는 것이 당연하다는 나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새벽 6시. 며칠째 이 시간만 되면 여측 없이 울어대는 뚱가다. 어미가 보고 싶어서일까. 자식을 땐 어미에게는 이 소리가 들릴까.
작은딸이 두어 달 전부터 강아지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아마 친구 집에서 반려 견을 키우는 모양이었다. 토요일만 되면 친구 집에서 놀겠다고 떼를 쓴 것은 이 때문이리라. 큰아이가 비염과 알러지가 있어서 동물은 애초에 기른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나다. 지금에 와서야 작은딸에게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나도 진짜 엄마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큰애 때는 육아전문서적이 진리인 양 공식에 대입하듯 양육했다. 알러지 체질인 아이의 상태에만 초점을 두며 키웠다. 모질게 ‘동물은 안 돼’라고 했던 것이 큰딸에게 상처는 되지 않았을까. 마음을 읽는 엄마는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 간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작은아이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교회 집사님이 키우는 반려 견이 새끼를 낳았다고 자랑을 했다. 한 참을 듣다 새끼 한 마리를 달라고 했다. 이렇게 뚱가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태어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다. 처음엔 씹지 못해 우유만 조금씩 먹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해 뒤뚱뒤뚱 걷다가 피식 쓰러졌다. 갓 돌배기가 걸음마를 배우며 뒤뚱거리다 넘어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꼬물거리는 모습과 말랑말랑한 살결이 살가웠다. 따뜻한 체온과 낯선 집에서 느끼는 두려움으로 달달 떨고 있는 흔들림에 나도 모르게 꼬옥 안았다.
반려 견에게 사람보다 더한 대접을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화를 내던 나다. 정 줄 것이 없어 동물을 자식 다루듯 한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런 내 모습이 부끄러워 이웃에겐 반려 견이 집에 있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꼬물대는 뚱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정을 느끼는 것은 어미 된 본능일까.
오늘 문득 잠을 청하고 있는 아기들 모습에 시선이 멈췄다. 잠들지 못해 이리 저리 뒤척이는 아기들의 모습을 본다. 오랫동안 어린이집 일을 하다 보니 아기들 모습이 매일 똑같은 일상으로 흘러간다. 오늘따라 꼬물거리는 모습이 꼭 뚱가 같아 눈을 떼지 못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태어나 성장하는 모습이 참으로 비슷하게 느껴진다. 강아지나 세 살배기 꼬마들이나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귀본능은 같은가 보다. 계란처럼 둥글게 움츠리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엄마 품에서 강제로 떨어진 두려움을 견디며 세상 밖으로 나아오고 있는 아기, 어미 곁을 한 달 만에 떠나 우리 집에 온 뚱가. 이렇게 둘의 엄마 품 떠나기 연습은 시작되고 있다.
나의 엄마 품 떠나기는 좀 늦었던가. 갓 스물을 넘길 즈음 어느 날, 길을 가다 거북이 한 마리를 산 적이 있다. 조그만 것이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동물을 좋아하던 동생이 반가워할 것 같아 선뜻 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 안 된 때였다. 여자의 몸으로 생계를 잇는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단한 일상에 집안 살림거리는 최대한 줄이고자 했던 엄마에게 짐이 되리라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갔다.
엄마는 귀찮은 물건을 샀다는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정작 그때부터 엄마는 매일 거북이를 챙겼다.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며 물속에서 허둥대는 거북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가끔 미소가 비쳤다. 혹여 퇴근이 늦어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거북이 밥을 주었는지 확인부터 했다. 내가 잊고 주지 않은 날은 굶겨 죽이겠다고 난리였다. 이렇게 허전한 중년을 달래고 계셨던 걸까.
다 큰 딸이 혹여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엄마였다. 내가 늦게 들어오면 잠들지 못했다. 딸이 들어오는 기척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엄마에게 피곤을 더하게 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아프기를 반복했다. 아픈 엄마의 모습이 귀찮고 짜증이 났다. 다 큰 자식이 알아서 잘 다니지 무엇이 걱정이 된다고 안자고 있느냐고 화를 냈다. 집착같이 느껴지는 관심에 숨이 막혔다. 어미의 본능을 헤아리기보다는 외면하고 있었다.
성인이 된 딸이 어미 품을 떠나려 버둥거린다. 어려운 살림과 지아비 복 없는 여자에게 딸자식은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했을 것이다. 꼬물꼬물 품에 안겨 젖을 먹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을 마음에서 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자연의 법칙을 받아들이기 위해 숱한 밤을 눈물로 지새웠을지 모른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외면했던 나의 이십대였다. 엄마가 느끼는 허전함이 내게는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는 청춘의 자만 속에 빠져 있었다.
우리 집으로 이사 온 거북이는 효자가 되었다. 거북이를 살피느라 엄마의 예민함이 줄어들었다. 허전한 마음 한 구석을 거북이가 채워준 걸까. 자식을 향한 애착을 거북이에게 떠넘기고 나는 안도했다. 엄마의 자리에 지금 내가 앉아 있다. 찰나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품속에 안겨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 결혼하지 않고 엄마와 둘이 영원히 살 거야, 하며 찰떡같이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던 큰딸. 철없는 딸아이의 말에도 흐뭇했었다. 딸아이 입에서 어느 순간부터 이성과 사랑에 대한 질문이 쏟아진다. 이에 질세라 딸에게 벌써부터 결혼은 늦게 하라고 주문을 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미워했던 엄마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되어가고 있음에 놀라 멈칫했다. 내 딸들에게도 숨 막히는 어미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엄마와 다른 중년을 만들 수 있다고 교만했던 나를 발견한다. 나 또한 자연의 섭리를 어길 수 없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몰랐다.
자식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신이 내게 잠시 맡긴 선물이라 했던가. 그런데도 아가의 여린 숨결을 느끼며 내 것인 양 착각을 한다. 목숨같이 사랑하여도 떠날 날을 기약하며 지내야 하는데 순간순간 잊으며 살아간다.
아기 새를 떠나보내고 빈둥지를 바라보는 어미 새가 된다. 빈둥지를 지키며 품안에서 꼬물대던 아이의 모습을 추억한다. 허전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다. 첫 보금자리를 떠난 아기 새는 세상 밖으로 나가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 순리를 알면서도 지금 선 이 자리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어미로 태어난 까닭인가. 대자연 안에서 돌고 도는 생(生)이다.
거북이로 자식 도리를 퉁 치려했던 나. 지금은 뚱가가 내 빈둥지로 들어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