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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진의 글방 Oct 13. 2024

첫 사랑

늦은 장마에 굵은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포장 길을 패어 내고 있는 빗줄기가 내 마음도 파헤칠 기세다. 딸아이와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침묵하고 있다. 경기도 평택 어느 포장 공장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이. 어린 딸을 일터로 보내는 미천한 어미가 된 나를 웃음 뒤에 숨기고 있었다. 오늘 내리는 빗줄기만큼이나 굵은 눈물 줄기가 가슴을 후려치고 있다.      

그때는 위대한 사랑이라 믿었다.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 생각한 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잘못 시작된 사랑은 삶을 평안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남겨진 상처를 혼자 감당하고 싶은데 상처의 파편들이 자식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는 유산이 되어버릴줄이야.


모난 돌이 부드러워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부드러운 돌과 만났을 때보다 힘든 것은 당연하리라. 모난 사람을 만나 부드러워지기까지 살을 깎는 아픈 시간들을 견뎌 내야 함이다. 강산이 서너 번쯤 변하면 가능할까?  그런 당연한 진리를 거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랑이었더라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큰 산을 두 번쯤 넘다보니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부족함을 채우려는 집착임을 알겠다. 타인을 통해 부족함을 채우려했던 나. 지금도 공허하다. 결핍이란 누군가를 만난다고 채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내면 깊숙이 아픈 나를 찾아서 달래 주고 사랑해 주어야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나이 드는 게 고마운 건 이해되지 않던 삶들이 자연스럽게 깨달아 진다는 것이다.    


청춘의 열정 속에는 자만심도 함께 서려 있다. 열정은 잘 살아 낼 수 있다고 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 띠 동갑도 넘는 남자를 만나 살아간다는 것이 용기 인줄 알았다. 거친 성격조차도 그때는 멋이라 생각했다. 내가 대단한 사랑을 하는 양 우쭐하는 기분에 젖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대차에서 오는 공감의 부재와 그의 거친 성격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붓듯 내 삶을 태워버렸다.    

  

부부의 연은 가정을 이루며 시작되어진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동등한 무게로 책임지겠다는 무언의 약속이 전제이기도 하다. 경제를 비롯해 집안 곳곳을 살피고 자식 돌보기를 함께 애써야 할 텐데. 우린 어찌 그리도 손발이 맞춰지지 않았던지. 여자인 내가 경제를 책임졌다. 그럼에도 남자가 무슨 대단한 권력이나 된 듯‘가장’이라는 직함만 챙겼다. 집안 살림이나 자식 살피는 것도 여자가 하는 일이라 그는 말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폭력을 쓰기도 했다. 물건들을 부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다. 이런 습관 정도는 애쓰면 고칠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일찍이 선인들은 알았던 모양이다. 한 사람이 변화하기까지 누군가의 희생이 무한한 시간 속에 녹아져야 한다는 것을. 젊음을 통째로 바치고서야 인정한다. 결핍 많은 사람과 만나 교집합이 되기까지 이번 생을 다해도 부족 할 수 있다는 것을. 상대를 고쳐보려 한 것이 정당하다 생각했던 나를 내려놓는다. 자신도 바꾸지 못하는데 상대를 바꾸려는 것은 교만이었다.      


사랑은 아픔을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공감의 부족이었을까. 아픔을 나누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내게는 힘겨웠다. 오랜 세월 풍파에 깎여 둥글둥글해진 몽돌처럼 살고 싶었다. 다름을 알아가며 함께 늙어가는 것이 부부라 생각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결핍 덩어리인 반쪽 앞에서 애쓰면 쓸수록 노예가 되었기에 나는 모두 놓아 버렸다. 모든 것을 팔아서 빚 정리를 하고 서야 우리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관심의 부재를 인정한다. 결혼은 성인이 된 자아가 동등한 위치에서 만나 서로의 모난 구석을 둥글게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내가 온전한 모습으로 섰을 때 온전한 배우자를 살필 수 있는 눈이 열린다. 공통분모를 찾아가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자신이 포용 가능한 범위를 알았을 때 비로소 섞여지리라. 한쪽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쪽이 포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모두를 망가뜨리고 만다.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반려자의 선택에 나는 신중했어야 했다.


뒤늦은 깨달음에 끝낸 결혼 생활과 맞닿을 즈음 큰 아이는 성년을 맞았다.  나는 아직 미성년인 작은 아이를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파산과 이혼은 큰 아이가 친구들보다 세상에 일찍 뛰어들게 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큰 아이는 공부가 싫었던 본인의 선택이라 괜찮다며, 도리어 자기 눈에 불쌍해 보였던 엄마를 위로했다.     


첫사랑이 떠나려한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을 했던 나다. 자식에게도 결국 같은 길을 걷게 해버린 내가 싫다. 몸속에 흐르는 피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끔찍한 생각에 괴롭다. 겪을 만큼 겪어버린 고통의 기억들을 안고 아이들은 살아가야 한다. 아비에 대한 나쁜 기억으로 어긋난 길을 갈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헤어짐은 하나의 선택이 되기도 한다고 딸에게 말해 주었다.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맞지 않음을 알았을 때 모두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이라고. 폭력을 다스릴 힘이 없을 때에는 피해가는 것도 살아가는 지혜라 여겨진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다. 늦었지만 끼워진 단추를 풀어낸다. 오랫동안 잘못 끼워져 못난 주름이 잡혀있다. 주름을 펴며 이제 차근차근 정성스레 단추를 끼워 보려한다.


딸과 맥주 한 캔을 마신다. 자식 돌보기를 포기해버린 아비의 뒷담화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남의 일처럼 우린 이렇게 함께 웃었다. 지금에라도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을 맞은 것이 행복하다. 엄마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큰아이는 사랑을 알기나 한 것처럼 이렇게 말한다.

“엄마, 엄마에게는 내가 첫사랑이다.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제대로 된 사랑이란 걸 한번은 하고 죽어야 되지 않나, 지금이라도 두 번째 사랑이 될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해봐.”

엄마나 된 것처럼 말하는 아이 앞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작은 아이는 학교에서 만들었다며 액자를 들이민다.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전원을 넣으니 깜깜한 밤을 모두 밝힐 수 있을 것만 같은 빛이 쏟아진다. 사랑스런 두 딸을 준 신에게 감사한다. 첫사랑 큰딸, 다시사랑 작은 딸. 이제야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나의 어리석은 사랑이 다 나빴던 것은 아니다. 가장 귀한 두 사랑을 만날 수 있었기에 나의 청춘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그와의 동거를 용서한다. 두 아이도 자신의 뿌리를 미워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빗소리가 잦아든다. 취기가 조금 오르자 작은딸이 남자 친구 얘기를 한다. 큰 아이는 엄마라도 된 듯 동생에게 남자 친구 만날 때 주의 사항을 일러준다. 첫사랑이 떠나는 내일은 눈부신 햇살이 비치면 좋겠다. 새로이 시작하는 인생의 초행길이 힘겹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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