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로 분주했던 사월을 보내고 오월을 맞이하며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곡우(穀雨): 양력 4월 20일 무렵, 곡우 때쯤이면 봄비가 내려 여러 가지 작물에 싹이 트고 못자리를 내는 등 농사가 시작된다. 곡우 무렵은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여서 곡우물을 받아 먹는 풍습이 있다. [출처: 다음백과]
올해 텃밭 정원의 모양새를 어느 정도 갖추고 나니, 꽃 욕심이 스멀 스멀 올라옵니다. 시골집 시내 농원에 나가 노지 월동꽃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데이지, 샤스타 데이지, 데모루, '데'씨 가문의 어여쁜 자제들입니다.
데이지는 참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이렇게 가까이 마주본 적은 또 처음인 것 같아요. 땅에 딱 붙어 있는 작은 아이도 있고 아직 꽃몽우리는 없고 민들레 잎을 닮은 아이도 있고, 국화과 꽃이라는데 봄에도 꽃을 보여주는 기특한 아이네요. 꽃말이 '평화'래요. Peace~! 데모루는 데이지와 성씨도 같고 모양새로 비슷해 보이는데, 아프리카에서 온 아이라 합니다. 국화과도 아니고 꽃말도 '영원한 사랑', 열정이 가득한 꽃입니다.
올해는 '데'씨 아이들을 잘 한번 키워보려 합니다. 튼튼히 키워서 내년에도 이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요.
밭을 가꾸다 보면 익숙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순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무얼 바라보고 살아왔던 걸까요?
바닥을 뒹굴며 거칠게 살아나갈 것 같은 잔디, 의외로 수줍은 아이입니다. 봄꽃이 한창 얼굴을 내밀 때도 숨죽여 있다가 '곡우' 즈음이 되니 새싹을 돋우기 시작했어요. 샌 머리처럼 희뿌옇게 변한 작년의 잔디 사이로 올해의 푸른 잔디가 하나씩 돋아나는 걸 보면 참 신기합니다. 이런 게 아름다운 세대교체의 현장일까요.
하지만 이 때, 방심해선 안되요! 잔디보다 먼저 돋아나기 시작하는 각종 잡초들!! 지금 뽑아주지 않으면 나중에 풍성하게 돋아날 잔디와 한데 얽히고 땅에 깊이 뿌리내려 정말 제거하기 어려워져요. 이때, 어린 잡초들은 손으로 톡하고 따주면 쏘옥 하고 빠지는 나름의 쾌감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도 생명인데, 좀 잔인한가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선택으로 자연을 좌지우지하려는 오만한 행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당, 우리 텃밭, 우리 꽃밭에서는 양해를 부탁드려요, 자연님! 우주님!!
이렇게 다양한 아이들이 잔디 속에 숨어 있습니다.
마당일을 하다보면 여기 잡초만 더 뽑고, 여기 화단만 더 정리하고..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아일체'되어, 나중에는 허리도 못펴고 날이 저물어서야 일을 끝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만큼 집중할 수 있는 일이여서 좋기도 하지만 그러다 금새 기운 빠지고 몸도 상하게 되요. 일을 시작할 때도 장갑도 끼지 않고 맨 손으로 몇 시간 땅을 파고 있을 때도 있어요.
올해는 시작할 때 장비 다 갖추고, 딱 바구니 하나를 채울 때까지만 잡초 제거를 해보기로 합니다. 이렇게 마음 먹으니 더 찬찬히, 땅과 교감하며, 즐기며 할 수 있더라고요. 물론 마당 한켠의 1-2평의 잔디만 다듬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올해는 이 호흡으로 가보려 합니다. 예쁜 정원 뽐내기 대회를 나갈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찬찬히' 땅과 하늘과 바람과 밭 아이들과 교감하면서 '더 게으른' 정원사가 되어 보렵니다.
장미와 수국 가지가 말라있긴 했어요. 하지만 마른 가지 위로 새싹이 돋는 아이도 있길래, 이 아이들도 기운낼 수 있을지 몰라, 하면서 기다렸는데, 아니였습니다. 작년에 야심차게 데려온 장미 세그루와 수국 두그루가 겨울을 못 견디고 끝내 가버렸습니다.
안녕! 잘가, 아이들아. 살아남은 장미 한그루와 죽은 장미 어미 옆에 새로 돋은 애기 장미는 올해 잘 키워서 겨울을 견딜 수 있게 해볼게.
정들었던 아이들을 보내는 것도 마음 아프지만, 새로 데려온 아이들이 한두주만에 떠나 버릴 땐 참 당황스럽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똑같이 정성껏 심은 아이였는데,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금새 가버린 아이들이 올해는 꽤 있어요.
오이 하나, 바로 옆 오이는 잘 자라고 있는데 이 아이는 왜 죽었을까요?
'데'씨 꽃들과 함께 들여온 바질, 열흘만에 시들하더니 곡우를 지나지 못하고 가버렸어요. 바질은 작년에도 이랬는데 왜일까, 왜일까, 또 하나의 정원 미스테리가 더해졌습니다.
곡우는 봄비를 내려 땅을 적시는 절기라 했는데, 올 봄은, 아니 어느새부터 우리 봄은 늘 가뭅니다. 시골에서 지내다 보면 우리 나라가 물부족 국가라는 사실이 실감나요. 비를 모아 마을 상수도를 운영하는 우리 마을에서는 비가 안오면 단수가 될 때가 꽤 많아요. '비'님을 기다릴 때가 정말 많은데, 올해 곡우에도 속시원히 비가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곡우 대신, 텃밭 꽃밭 아이들이 목을 적실만큼만 물뿌리개 비를 내려봅니다.
물뿌리개를 땅과 하늘 대각선 방향으로 살살 뿌려주면,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마른 목을 축이는 모습이 보여요. 비님이 와주면 더 좋았겠지만, 물뿌리는 이 순간이 아이들에게도 내게도 힐링의 순간입니다.
땅에 조용히 떨어지는 물소리,
마른 땅이 촉촉히 적셔져 명도가 더해지고,
이때 작은 바람이라도 지나가시면
땅, 꽃, 풀향이 온 몸을 휘감고 춤을 쳐요.
오월의 첫날입니다. 텃밭 꽃밭 아이들은 걱정 없이 잘 자라고 있어요. 데이지 덕분인지 정말 '평화'로운 봄날입니다. 오월이 되면 무섭게 자라나 이곳을 호령할 아이들이 벌써 조금은 두렵기도 하지만, 미리 걱정하지 말아요. 이 아이들의 '유년기'를 조용히 음미해봅니다.
사월과 오월 사이를 이어주는 이번주 대세는 '철쭉'입니다. 집을 애워싸고 마당가로 자리잡은 분홍, 빨강, 하양 철쭉이 화려하게 피었습니다. 철쭉과 반갑게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눠요.
신나고 또 분주했던 사월, 안녕!
새 모습으로 곧 보자, 오월, 반가워!
게으른 정원가의 '곡우' 활용법
1. 모양도 색깔도 꽃말도 어여쁜 꽃들 맞이
2. 새로 돋운 잔디 편애하며 잡초 제거하기
3. 봄비를 기다리며 '물뿌리기' 명상 즐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