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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날 May 21. 2022

입하, 채움과 비움 사이

키울 것과 뽑을 것을 결정하는 일이란 자연스러우면서도 부자연스럽습니다.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입하(初夏): 곡우와 소만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 양력 5월 5~6일 무렵이다. 태양의 황경이 45°이며, 이때부터 여름이 시작된다. 농작물이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하며, 해충이 늘어나고 잡초가 우거져 농가 일손이 바빠진다. 보리가 익어가서 추수를 기다리는 철이기도 하다. [출처: 다음백과]




여름이 열리면서 본격 농사가 열립니다.


본격 농사라고 해놓고 보니 문득 '농사'의 국어사전 의미가 궁금해서 찾아보았어요.

<농사: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어 거두는 등의 농작물 재배 과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올해 저는 ‘씨’를 뿌리지 않고 모두 모종을 심었으니 '농사'가 아닌 걸까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여전히 초보 텃밭꾼이지만 입하가 지나고 초여름이 열려, 토마토, 가지, 오이, 고추, 호박 같은 큰 열매가 열리는 아이들을 텃밭에 데려와 심을 때면 올해 텃밭 '농사'가 시작되는구나! 설레고 또 분주해집니다. 입하이자 어린이날 휴일인 5월 5일, 시골 시내 농원은 인산인해입니다. 모종을 사려온 인파를 뚫고 '토.가.오.고.호' 모종 몇 개씩을 데려와, 비료만 얹힌 채로 주인을 기다리는 밭두둑에 자리를 잡아주었습니다.

토마토를 편애하는 편이에요. 열매가 열리면 바로 따서 옷에 슥슥 두어 번 문지르고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토마토 곁순 따줄 때 나는 향기를 너무너무 좋아하거든요. 토마토를 가장 볕 잘 드는 두둑에 널직이 자리 잡아주고 그 뒤에 가지를 열세우고, 그 양쪽 두둑으로 모종이 제일 다양한 오이를 심고, 마지막으로 소나무 주변 뒷 쪽이나 밭인지 그냥 둔 땅인지 애매한 곳들에 호박, 수박, 참외 같은 덩굴이 많이 지고 경험상 많은 비료 없이는 열매가 잘 열리지 않았던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작물들을 심어줍니다. 두둑과 고랑 사이에 벽돌을 가지런히 놓아주니, 아! 드디어 올해의 텃밭이 어여쁘게, 참으로 기특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텃밭에 잘 자리 잡은
기특한 아이들은 여름을 열고,
도시에서 닫혔던 마음을 열어줍니다.


분주한 텃밭 옆 차분한 꽃밭


곡우 때 새로 데려온 정원의 데이지, 데모루, 아이리스 그리고 어엿한 이 년 차 장미, 수국, 백합, 무스카리, 붉은꽂조팝은 차분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특별히 화려한 면도 특별히 극성스러운 면도 없이, 차분히 잘 자라주고 있어요. 그래도 죽은 장미가 빠진 한 켠 땅이 덩그러니 허전해 보여, 입하 때 '토가오고호' 데려올 때, 샛노랑 샛주황 잉카 두 아이들 같이 데려왔습니다. 잉카는 메리골드를 닮았는데 꽃송이가 꽤 커요. 올해 처음 접하는 '잉카'라 검색을 해보는데 빛나는 '잉카 제국'에 밀려 찾아지질 않아요. 암튼 장미의 빈자리를 대신해주는 어여쁜 아이입니다.  



드디어 풀린 정원 미스터리

작년 가을에 거둬 어딘가에 잘 보관해뒀던 튤립, 수선화 구근들.. 봄 내내 아무리 찾아도 없었던 구근들을 드디어 찾았습니다! 참 어이없게도, 하루에도 십여 번은 들락거리는 화장실 세탁기 옆 바구니에 신문지에 잘 싸진 채로 꼼꼼히 보관되어 있었어요. (바구니에서 청소도구를 찾다가 우연히 이 신문지 뭉치를 찾아냈지 뭐예요!)  

이 아이들을 애타게 찾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디에 놔뒀을까 생각하고 생각하고 했거든요. 추리소설 읽어 나가듯 과거의 내 생각을 아무리 추리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과거의 내가 놓은 단서들. 찾고 보니 살포시 짐작은 됩니다. 집 밖은 너무 춥고 집안도 사람 없는 평일에는 춥긴 마찬가지만 그래도 안이 좀 낫겠고, 하지만 사람 없을 때 집 안은 문을 꽁꽁 닫아둬서 쪽문을 열어두는 화장실이 최소한의 통기를 되겠다 싶어서 여기 두었나 봐요. 이 것도 사실 추리일 뿐 과거의 내 생각을 정확히 짚어낼 순 없었어요.

불과 몇 달 전의 내 생각조차 짐작할 수 없는
이번 생은 카오스, 온통 미스터리입니다.


봄 밭을 신나게 뒹굴었어야 했던 구근들을 뒤늦게나마 정원에 심어봅니다. 이제사 심어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아니, 아마 살아내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겨우내 고생한 구근들을 땅으로 흙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은 지금의 내 마음입니다.  

이 마음도 시간 속에 흩어지겠지요.



초여름, 이 성장의 계절  

가장 먼저 뛰어나가는 아이들이 있으니, 바로 잡초들입니다.


이왕이면 우리 정원에서는 보지 말자 이런 마음을 애초부터 먹고 있어서, 얘네들의 반항심도 하늘을 찌르는 걸까요? 이제 막 키가 크기 시작한 잔디 사이로 마치 나무처럼 크게 웃돌아 자란 잡초들이 무성합니다. 입하를 한주 지난 주말, 시골집에 오니 가장 먼저 인사하는 '잡초 나무'들을 앞에 두고 큰 한숨이 쉬어집니다.


잡초와의 싸움에서 난 끝내 지고 말 거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감이 느껴집니다. 몇 해 동안 학습해온 익숙한 감정이기 때문일 거예요. 혼자 아등바등 애써도 자라는 잡초들을 당해낼 수 없고, 마당에 잡초도 있는 거지 하고 마음을 놓아버리면 그때부터 내 세상인 듯 더 쑥쑥 자라나 장마를 지나고 나면, 정말이지 텃밭정원에 두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한 해는 그렇게 발도 못 디디다 늦가을에 제초제를 뿌리고서야 밭에 들어갈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봄부터 기다려온 상추와 꽃, 그리고 반갑지 않은 잡초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여름은 충만하면서도 두려운 계절입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작물과 잡초를 구분 짓는 것도 인간의 편의에 의한 것이고, 잡초도 어엿한 자연의 일부이니, 나의 충만감도 두려움도 그저 지나가게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지요.

키울 것과 뽑을 것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이 계절은 참 자연스러우면서도 부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아무튼, 올해 입하에도 '토가오고호'를 채우고, '잡초나무'들을 비워냅니다.


제초 전과 후. 해가 지도록 하루종일.. 안쓰러워하시는 엎집 아주머니가 도와주셔서 겨우 겨우 마당의 큰 잡초들을 비워냈어요


장미 매발톱 꽃들의 반전

작년 겨울을 유일하게 이겨낸 기특한 장미 한 그루 옆에, '내가 더 잘 나가!' 외치듯 더 크게 살아난 이 년 차 장미 매발톱 두 그루가, 혹시나 장미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나중에 장미 옆 자리를 빼고 나무 아래 한 켠으로 옮겨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잘 자라는 매발톱은 잘 자라니깐 안심이 되고, 잘 못 자란 장미는 애틋해서 그런 걸까요, 매발톱은 싸게 샀고 장미는 비싸게 사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자본주의심 때문일까요. 아무튼, 기대치 않았던 장미 매발톱이 화려한 보라색과 분홍색 꽃들을 수십 개 한꺼번에 틔워내며 꽃밭을 화려하게 진두지휘합니다.  


반면, ‘손 탄' 고수 새싹의 죽음

내 기대, 내 욕심을 드러내지 않은 덕에 장미 매발톱이 잘 자란 것도 같습니다.

작년에 왕성하게 자라 가을에는 씨로 새싹을 돋우기도 했던 고수가 겨울을 지나고 씨가 말라버렸었거든요. 그런데 입하가 한주 지난 주말, 코코넛 매트를 깔아 둔 고랑 틈 사이로 고수 새싹하나를 발견했어요. 너무너무 반갑고 너무너무 기특해서, 매트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고수를 뽑아 텃밭 허브존 명당자리에 옮겨주고 주변에 돌도 쌓아주고 아껴뒀던 비료도 놓아주고 물도 주고 애지중지 돌보았는데요. 옮긴 직후부터 시들 시들하더니 그다음 날 운명을 다하고 말았습니다.

내 기대, 내 바람, 내 욕심이 어렵사리 스스로 살아낸 고수를 죽음으로 내몬 거예요. 그러고 보니 고수 주변으로 정성껏 둘러준 돌들이 애초 고수 무덤이었나 싶습니다.


자연의 채움과 비움의 결과는 인간의 예측과 바람을 빗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저 그러할 뿐, 내 마음을 쫓아가지 않는 자연이 자연스러운 거니깐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이 받아들일 때는 언제나 크고 작은 번뇌가 있습니다.


5 초순,  구역을 접수한 장미 매발톱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틀을 꼬박 제초하고 나니 보기 좋게 변신한 마당 잔디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자연의  다른 ‘처분’을 조용히 기다려봅니다.





게으른 정원가의 '입하' 활용법

1. 토마토,가지,오이,고추,호박으로 텃밭 채우기

2. 마구마구 크기 시작하는 마당 잡초들 비우기

3. 뜻하지 않았던 좋은  아쉬운  모두 받아들이고 조용히 자연의 흐름을 기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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