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자리 비운 사이, 시골집에 6월의 장미가 활짝 피었습니다.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망종(芒種) : 소만과 하지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 양력 6월 6일 무렵이다. 망종은 논보리나 벼 등 씨앗에 수염이 달린 곡식을 파종한다는 뜻으로, 태양의 황경이 75°인 때이다. 이 시기가 끝날 때까지 밭보리를 수확하여 햇보리를 먹게 되며, 논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므로 농사일이 가장 바쁜 시기이다. 아이들은 보리이삭 줍기와 보리 그스르기에 바쁘다. [출처: 다음백과]
'망종'이 있었던 연휴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좋은 계절, 시골집 만큼 좋은 곳이 또 있으랴 했건만 막상 여행을 떠나니 좋더라고요. 텃밭 꽃밭 아이들은 까맣게 잊은 채 잘 먹고 잘 달리고, 2주만에 도착한 시골집은 까만 밤이었습니다. 달빛에 거슴프레 비친 텃밭 정원은 생소한 기운이 감돕니다. '사각사각' 스치는 밭 끝의 낯선 감각.
'망종'은 낯선 절기입니다. 까끄라기 '망(芒)'에 심을 '종(種)', 까끄라기는 벼나 보리 등의 낟알 겉껍질에 붙은 수염이라 하네요. 논보리나 벼를 심는 절기라 하는데, 논농사는 지을 일도 지을 생각도 안해봐서 낯선 것일까요? 망(芒)은 어두울 황으로도 뜻풀이가 되어 있는데, 2주만에 다시 찾은 정원이 그야말로 어두울 황에, 까끄라기 마냥 서걱서걱 낯섭니다. 6월의 초여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내가 풀 뽑아주던 그 잔디 맞니?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십 센치는 더 훌쩍 자란 잔디가 마당에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한 밤에 '사각사각' 걸어다니는 키가 큰 잔디. 마치 자길 놔두고 여행 다녀온 엄마에게 나 혼자 이만큼 컸다고 항의하듯 서슬퍼런 잔디는 풀잎마다 씨앗을 맺고 있습니다.
텃밭의 토마토는 길게 자라난 줄기를 어찌 주체할 수 없어 구비구비 굴곡지게 땅바닥을 뒹굴고 있습니다. 지지대를 세워줬지만 크게 성장하는 줄기의 힘을 바닥 가까이 묵은 노끈 하나로는 버티지 못했던 것이지요. 오이와 호박은 그새 어미가 되어 열매들은 여러 개 품고 있습니다.
모종 꼬리표 뗀지 한달이나 되었으려나요? 그 새 자기 몸통보다 더 큰 열매를 품고 있어야 하는 이 아이들이 웬지 짠하고 고달퍼 보입니다.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 요즘 속도에 맞춰 모든 것이 빠르게 성장하고 결실을 맺는 걸까요?
이주 만에 돌고 도는 것이 원래 자연의 속도인가요? 초여름의 속도는 따라 나서기가 조금 버겁게도 느껴집니다.
토가오호고만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게 아닙니다. 봄 내내 텃밭의 주인공이었던 쌈채들이 초여름의 성장세에 자리를 뺏길까 꽃대를 길게 세우고 꽃을 피워댑니다. 흰 꽃, 보라 꽃, 노랑 꽃, 색깔도 다양하고 작은 꽃이 풍성하게 열리는데, 묘하게도 쌈채들의 꽃은 구석진 방 오래된 그림처럼 뭔가 쓸쓸합니다. 식탁의 메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때여서 그럴까요?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한 아이들은 쓴 맛이 나서 더는 못 먹게 됩니다.
하지만 씁쓸하고 쓰게 느껴지는 건 사람의 일이고, 쌈채 아이들은 올해 봄도 초여름도 잘 살아내고 그 증표로 꽃을 피우고 씨앗들을 품는 것이겠지요.
이 계절의 끝을 잡고, 꽃 피운 아이들의 잎을 식탁으로 불러냅니다.
더 써지기 전에 루꼴라와 쑥갓 잎을 한아름 따서 오늘은 이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요리를 해봅니다. 쑥갓은 쌈으로 먹어도 그닥이고 사실 많이 애정하는 아이는 아니였어요. 근데 우동에 넣어 먹으니 이 요리의 주인공은 단연 쑥갓입니다. 향긋하고 살짝 쌉싸름한 맛이 우동을 고급진 요리로 만들어줍니다. 루꼴라와 달걀을 마요네즈에 버무려 만든 샌드위치는 아점 메뉴로 정말 딱인 음식입니다. 이 간단한 조리로 이렇게 향긋하고 풍미진 요리를 입에 넣을 수 있다니요! 커피와 함께 하는 이 맛은 길고양이도 불러 앉히는 맛입니다. (샌드위치는 내 꺼! 길고양이에게는 멸치 몇 마리 건네주었어요.)
누군가는 5월을 장미의 계절이라 했던가요? 산중턱 시골집 정원에는 6월이 되어서야 장미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낸 두 그루의 장미, 초여름이 되도록 작년보다도 더 작게 자란 장미였는데, 이 작은 몸에 큰 장미꽃을 피워냈습니다.
잊고 있을 때 의연히 피어난 장미. 절절한 애착보다 때론 무심함이 필요한 건, 매사에 너무 애쓰며 살려는 나 자신인 것 같습니다.
'망종'을 잊을 '망(忘)'을 심는 때로 삼고, 마음의 까그라기들을 흘려 보내봅니다.
6월의 이 순간을 사진 속에 담고 싶은 건 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날이 맑아도 날이 흐려도 어디에 카메라 렌즈를 대도 정말 찬란한 그림이 담깁니다.
왕성한 생명, 갓 만든 음식, 사랑하는 사람, 풀밭에 누워 몸을 움직이는 시간.
초여름의 이 향기를 기록할 수 있다면!
1. 훌쩍 커버린 토가오호고의 열매 맞기
2. 온 마당을 덮친 잡초 (가능한 만큼만) 제거하기
3. 소나무 가지 사이 사이 숨통 틔어주기
4. 찬란한 시절 사진 담아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