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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날 Jul 03. 2022

하지엔 달리고 행복하지!

해님이 가장 오래 머물고 비님이 달려 나와 여름의 절정을 축하합니다.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하지(夏至) : 망종과 소서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 양력 6월 21~22일 무렵이다. 태양의 황경이 90°이며 이날 태양이 가장 높게 있어 북반구에서는 낮시간이 1년 중 가장 길고, 일사량과 일사시간도 가장 많다. 햇감자가 나오고, 이 시기가 지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마다 기우제를 올렸다. [출처: 다음백과]


낮이 가장 길어 기묘한 날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에 자전거를 타고 퇴근을 했습니다. 저녁 8시가 지나도 해가 질 생각을 하지 않아요. 과연 여름의 절정이 오고 있습니다.

하지 8:00 PM, 여전히 짱짱한 해가 달리는 사람들을 응원합니다.


북극에선 종일 해가 지지 않고, 남극에선 수평선 위에 해가 나타나지 않는대요.

정말 종일 하얗고, 종일 까만 날일 수 있을까요? 세상이 한순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점이 된 것 같은 느낌일까요? 아니면 이틀의 낮과 밤으로 쪼개, 낮은 낮끼리, 밤은 밤끼리 이어 붙인 느낌일까요? 시간이 길게 늘어진 느낌일까요? 사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내가 경험한 세상에선 아무리 낮이 길어도 밤은 오고, 아무리 밤이 길어도 해가 뜨니깐요.


익숙한 세상이 조금만 다르게 변주되어도
내 '실존'이 의심되는 기묘한 순간
그 순간의 절정은 죽음일까요


내가 경험하고 실체라 믿는 세상은 아마도 작은 상자 속, 보이지 않는 점 하나. 그 점 하나를 의미 있게 찍어보겠다고 오늘도 우리는 달립니다.



비가 와서 좋은 날

하지 다다음, 후두둑 비를 맞으면 달리는 기쁨!


하지 때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마다 기우제를 지냈다는데, 다행히 올해는 하지 즈음 비가 내려줍니다. 하지를 지나며 기온이 점점 올라가 삼복더위를 맞이하게 되고, 또 그 더위를 식혀주려고 비가 내려주는 이 자연의 조화!


달릴 만합니다.

더 더워지기 전에 내 몸을 타고 둘레길을 열심히 달립니다. 달릴 때 비가 내려주면 어찌나 시원한지! 온몸으로 해와 비를 조우하며 달리는 기쁨,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기의 연출에 맞춰 날마다의 날씨가 무대에 오르듯, 하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6월 말의 날씨가 신비롭습니다.



게으른 정원사도 달려야, 하지!

하지 뒤이어 따라온 장마 초입에 반짝 볕 뜬 주말, 본격 장마 대비로 시골집은 분주합니다.

우선, 집안에 제습기를 빵빵하게 돌려줘야 해요. 제습기 없이 지낸 첫 해 여름, 온통 곰팡이가 피어버린 집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죠. 산과 물에 둘러싸인 시골집은 여름엔 제습기 없이는 견뎌내질 못합니다.


한편, 마당은 분필 가루 선녀 나방과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입니다.

여지없이 올해 여름도 텃밭 작물과 마당 나무에 하얀 분필들이 흩뿌려져 있습니다. 꽃이 진 철쭉나무 위로 뾰족이 올라온 줄기마다 하얀 가루, 구멍 숭숭 뚫린 가지 잎을 뒤집어 보면 거기도 하얀 가루, 손으로 가루를 털어내려 하면 하얀 벌레가 족히 30센티 위로 톡톡 튕겨져 올라오는데, 정말 얼마나 징그러운지! 온몸이 근질근질해요. 벌레 먹은 작물의 잎을 하나하나 뒤집어 털어내도, 철쭉 윗 줄기를 가위로 잘라내도, 증식하는 선녀 나방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아이들이래요. 물 건너온 벌레들은 국내에 천적이 없는 경우가 많아 빠르게 증식하고 농작물에 해를 준다 합니다.


(좌)가지 잎 뒤를 활보하는 선녀나방과 (우)그에 맞설 올해의 농약 장비들!


작년에 사두고 창고에 모셔두었던 농약을 꺼내 뿌려보기로 합니다. 굳이 작은 텃밭과 마당에 제초제나 농약을 뿌리고 싶지 않은 나름의 원칙도 있지만, 약을 안 뿌리는 더 큰 이유는 몸이 너무 고되서예요. 재작년인가, 뭣도 모르고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농약을 뿌렸다가, 안과와 피부과를 전전하며 아주 고생한 적이 있었거든요. 해충이 죽기 전에 내가 줄을 뻔!

올해는 장비를 갖춰봅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눈과 호흡기 보호! 자전거 고글과 창고에 굴러다니던 방진 마스크와 94 미세 마스크를 덧쓰고, 도톰한 운동복을 입고 몸의 어떤 부분도 드러나지 않게 꽁꽁 싸매고, 5L 물에 농약을 적당량 섞어 마당 구석구석에 뿌려주었습니다.

이맘때 의례히 나타나는 텃밭과 정원의 변화 그리고 불청객들.. 매년 루틴 하게 돌고 도는데, 늘 어떻게 해야 할지 헛갈리고 막막하고 새로운데, 자연은 어떻게 늘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돌아갈까요?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 자연이란 한자는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가끔씩 이름에 담긴 놀라운 통찰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여름 정원의 훼방꾼, 두더지와 칡덩굴

그리고 또 다른 여름 정원의 훼방꾼, 두더지와 칡덩굴입니다.

두더지는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밭 여기저기에 자취를 강력하게 남겨두는 아이입니다. 땅 밑으로 다니면서 알뿌리를 캐 먹기도 하고, 작물 뿌리를 땅 위로 올려놓기도 하고, 소리 없이 강력한 훼방꾼입니다. 한번 나타나라! 하면서도 두더지가 야행성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막상 마주치면 나 살려라 줄행랑을 칠, 소심한 정원사입니다. 이 정원은 두더지에게도 삶의 터전일 테죠. 그냥 두더지 지나간 곳을 발로 꾹꾹 눌러줄 뿐입니다.


사실 더 성가신 건, 칡덩굴입니다. 봄에는 땅 밑에 살살 숨어있다가 여름이 되면 1-2주 만에 급격하게 마당 나무를 타고 올라와 '나 잡아봐라' 약을 바싹 올리는 녀석입니다. 뿌리째 캐내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덩굴줄기를 아무리 잘라봤자 소용없어요. 부질없이 칡덩굴 한 바구니 뜯어내고, 잎이 지는 겨울을 기약해봅니다. 겨울에 뒷산을 헤매서 칡뿌리를 찾아 캐야 해요. 시골 살이 중 가장 난이도 있는 일 중에 하나지요.


한 여름밤의 행복

분주한 여름 맞이에 긴 해를 보내고 느지막이 들어서는 한 여름밤은 큰 위안입니다. 끝물 상추를 모조히 수확해 엄마가 만들어주신 상추 김치에 무심히 국수를 말고 위에 샐러리를 얹혀 먹는 건강한 여름 밥상. 밥 다 먹고도 또 피자 빵을 구워내서 혼자 한 모금 소심하게 들이켜는 맥주 한 잔에 여름밤의 행복은 더욱더 깊어 갑니다.


낮이 길어 좋은 하지의 짧은 밤은 역설적으로 더욱 빛이 납니다.

새로 들인 태양광 전구 두개를 소나무에 걸고, 어두워지는 마당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게으른 정원가의 '하지' 활용법

1. 낮이 긴 날, 비 맞으며 달리기

2. 선녀나방의 출현! 농약을 뿌릴 수밖에

3. 두더지와 칡덩굴 의연히 맞이하기

4. 분주한 여름 맞이 후, 한 여름밤의 피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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