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다른 멋을 내는 봄에게 상추와 구근 옷을 선물해요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청명(淸明): 양력 4월 5일이나 6일 무렵. 태양의 황경이 15°이며, 봄이 되어 삼라만상이 맑고 밝으며 화창해 나무를 심기에 적당한 시기이다.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논밭에 가래질을 하고, 못자리판을 만들기도 한다. 청명은 6년에 한 번씩 한식과 겹치거나 하루 전이 되기도 하여, 대개 한식 풍습과 겹친다. 하늘이 맑게 개어 만물의 생기가 왕성해지며 봄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출처: 다음백과]
드디어 봄의 화려한 마술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봄은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룩을 뽐냅니다. 아침에는 웅크리고 있던 꽃봉우리가 오후에는 얼굴을 내밀고 그 다음 날에는 활짝 웃어요. 사월초 청명 즈음 울 마당에 처음으로 꽃을 틔운 아이는 진달래입니다. 잎 없이 부끄러운지 마알간 옅은 분홍빛을 은은히 내며 소나무 아래 조신하게 꽃을 틔웠습니다. 청명과 곡우 사이 즈음에는 소나무 주변으로 개나리와 오얏꽃(언뜻 벗꽃처럼 보이는 하얀 꽃나무는 사실 정확한 이름을 몰라요)들이 웅성 웅성 대며 봄마실을 나왔습니다.
반대쪽 밭 주변에는 노란 산수유가 첫 선을 보이고 며칠 더 지나니 복사꽃(매화인 줄 알았는데 올해 꽃검색을 해보니 복사꽃으로 나왔어요)이 만개를 합니다. 봄꽃은 대부분 움트기 시작해서 만개하고 지기까지 열흘이 채 안되는 것 같아요. 한주만 시골집에 안들러도 얼굴도 못 보고 지나치는 꽃들이 있으니깐요.
매일 매일이 소중한 봄날입니다. 먼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삶도 이 봄처럼 눈 깜박 지나가는 것이겠죠. 그래서 봄꽃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춘분 즈음 폭신해진 땅에 퇴비를 올려놨더니, 저절로 비옥한 텃밭 정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올해는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땅을 다 뒤집고 낙엽을 깔끔히 치우고 그렇게 제대로 시작할 자신이 없어서요.)
청명한 청명 즈음, 텃밭 가장 가운데 이랑에 갖가지 상추를 심었습니다. 가장 친근하고 가장 만만하고 또 가장 유용한 아이. 완연한 여름이 되서 상추 나무가 되기 전까지 날마다 신선하고 간편하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고마운 아이입니다.
도시 모종, 시골 땅, 그 사이 내 욕심
올해는 이 아이들을 과천화훼단지에서 쇼핑해왔어요. 꽃상추, 치커리, 적로멘, 청로멘, 적오크, 아삭이상추, 모둠 상추 한판에 72개 9천원! 아이러니하게도 시골의 농원보다 도시의 큰 화훼 조경단지의 꽃과 모종이 더 싸요. 도시에서 시골로 모종을 72개나 사들고 와서, 이 중 몇 개는 자라지 않아도 아쉽지 않겠다 싶은 호사스러운 마음으로, 땅이나 아껴보자 하는 이상한 마음으로 상추를 촘촘히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 와서 보니, 일주일 사이 땅을 단단히 움켜쥐고 짱짱하게 잎을 세우고 있는 72개 상추들을 보니 너무 기특해서, 몇 개는 다시 캐서 넓은 땅으로 옮겨주고 다시 살펴주었습니다. 어느 때는 땅 한 뼘도, 돌 몇 개도, 퇴비 몇 줌도 아끼게 되고, 뭘 그렇게 아껴놓고 어떤 욕심을 부리려고 그러는지, 참 모를 일입니다.
흙을 만지고 생명들을 바라보고 할 때도 크고 작은 욕심은 잘 놓아지지가 않아요.
상추 옆 두둑엔 허브가 자리 잡았습니다.
작년에 키웠던 허브들은 겨울을 나지 못했어요. 꽤 오래 건실했고, 씨앗도 떨어져서 가을엔 새싹도 머리를 내밀곤 했었는데.. 해가 바뀌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요. 역시 허브들은 노지에서 겨울나기는 힘든가봐요. 매년 이렇게 잃고 또 들여오고 했던 것 같아요. (올해는 겨울 되기 전에 화분에 옮겨 실내에 들여나야겠습니다.)
그래서 올해 또 데리고 온 아이들은 레몬민트, 로즈마리, 바질이예요. 아직 못데리고 왔는데 루꼴라와 고수도 키우고 싶어요. 샐러드, 국수, 파스타 먹을 때 바질, 루꼴라, 고수를 곁들이면 정말 풍미가 살아나거든요. 냠냠.
텃밭이 꽤 커서 밭의 3분의 1을 정원으로 만들었어요. 작년 봄 일이예요. 그래서 올해로 2년차 정원입니다.
집 한켠에 쌓여있던 돌들로 구획을 만들고, 맨 앞엔 갖가지 작은 꽃들, 가운데는 애지중지 모셔온 장미나무들, 맨 뒤는 작약 수국들. 장미와 수국들은 기특하게도 겨울을 잘 건너온 것 같은데, 아직은 확실하진 않아요. 새싹이 돋은 아이들도 있고 아직 퍽퍽한 나무처럼 변한 가지들만 있는 아이들도 있어요. 어쨌든 장미와 수국은 기다려 보기로 합니다.
맨 앞줄 작은 꽃들은 세대 교체를 해봅니다. 죽은 아이들은 캐내고, 살았지만 꽃 없이 훌쩍 키만 큰 아이는 다른 데 옮겨심고, 어지럽게 시든 줄기와 잎은 잘라내고, 새 아이들을 맞을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바로 사서 들고온 아이들만큼 설렘을 주는 것도 없으니깐요. 아직 2년차 정원이라서 그런 거겠죠, 한 해 한 해 지나다보면 그 세월을 함께 한 오래된 아이들이 더 기특하고 예쁠 것 같긴 해요.
참 묘한 것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한 아이들이 있어야 또 다른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기회의 땅이 생긴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기대가 되요.
겨울을 이겨낸 붉은꽃조팝, 패랭이꽃, 튤립, 무스까리 두어개를 사이에 두고, 과천화훼단지에서 데려온 각종 컬러의 아이리스, 가을에 핀다는 꽃무릇 구근 여러 개, 그리고 화원 사장님이 이제 꽃 질 시기라고 선물로 주신 히야신스를 잘 보이게 심었습니다.
그럴싸한 구근 정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정원 미스테리,
그 많은 구근들을 어디에 두었을까?
그런데 정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어요. 작년가을에 튤립과 백합, 수선화 구근들을 잘 캐서 잘 보관해 두었거든요. 마당 데크 한 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걸어놨다가, 겨울이 깊어져 너무 추워져서 어디 덜 추운 곳-마당 보일러실이나 컨테이너-에 질 두었을 것 같은데, 집 인팎을 샅샅히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정말 궁금해요. 이제 이 수수께끼는 역사 속으로.. 보내야 겠지요.
이 청명한 봄에 상추도 심고, 정원도 새로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마당일을 시작하니 가슴이 뛰어요.
드디어 청명을 지나, 오늘 만난 세계도 아름답지만, 앞으로 만날 세계가 더 아름다울 거라고, 더 피어날 거라고 봄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작되는 봄은 늘 더 씩씩하게 살아낼 힘을 줍니다.
1. 매년 텃밭은 상추로부터 시작된다. 상추모종심기
2. 2년차 정원, 앞줄의 세대교체! 구근정원 만들기
3. 한참 지나 글을 올릴 만큼 이렇게 일도 많고 기쁜 마음도 가득한 봄날을 한껏 품고 즐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