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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날 Sep 11. 2022

반 바퀴 돌아 처음처럼 '처서'

거짓말처럼 추워진 날씨에, 거짓말처럼 여름이 잠잠해졌습니다.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처서(處暑) :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불렀다.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산소의 풀을 깎아 벌초를 한다.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도 이무렵에 하며..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담처럼 파리·모기의 성화도 사라져 가는 무렵이 된다. [출처:다음백과]


거짓말 같은 일들

계절을 지나는 걸 보면 자연은 꼭 마술사 같습니다. 펑펑 내리는 눈과 함께 거짓말처럼 시작된 입춘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절기 반 바퀴를 돌아 처서엔, 하루아침에 서늘한 기운이 감쌉니다. 어제만 해도 열대야와 습기에 잠을 설쳤는데, 처서를 지난 주말 시골집은 어느새 전기장판 온기 없이는 서늘한 밤입니다.

계절을 지나다 보면 옛 말이 하나 그른 게 없어요.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고 지나간다."더니, 여름 내내 큰 비에도 기세 등등하던 잡초들도 정말 거짓말처럼 얌전해졌습니다. 길게 자란 잡초들이 시큰둥하게 누워있다가, 큰 힘 들이지 않고 위로 잡아당기면 쑥 하고 빠져버려요.


이맘때 놀러 오는 잠자리

여름과 겨울 사이를 신나게 유영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잠자리입니다. 시골집 빨랫줄이 이래서 필요하구나 싶게, 잠자리들이 빨랫줄에 나란히 앉아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잠자리를 무얼 먹고 살까요? 잠자리들이 텃밭 정원에 노니는 걸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오히려 사람 가까운 너른 마당에서 눈에 더 많이 띄는데, 내 눈에 보이는 건 잠자리 세계의 0.001%도 안 되는 세계일 테니, 어디선가 잠자리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며 치열한 잠자리 생(生)을 살아가고 있겠지요.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와 여름과 가을 사이를 유영하는 고추 잠자리


하늘을 품게 된 소나무

늘 걱정이었습니다. 한 해 한 해 엄청난 성장 속도를 자랑하며 자라나는 큰 나무들이 집과 마당 공간을 점점 침투하고 있었어요. 옆집 앞집 어르신들이 우리 집 나무를 보면서, '이러다 집 다 덮친다, 잘라야 한다' 한 마디씩 하시곤 했는데, 제 키로는 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아이들이었어요. 전문 정원사분을 언젠가는 초빙해서 작업을 해야지 하면서도 막막했는데 (또 비용도 많이 든다 들었고요), 드디어 구세주를 만났습니다. 동네 반장님께서 조경 작업도 해주신다는 동네 어르신들 주선으로, 드디어 우리 집 큰 나무들을 손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시골에서의 작업 의뢰 방식은 매우 심플합니다. 부탁드려요! 하고 말씀드리면, 시골집을 비운 평일 어느 때, 별다른 말씀 없이 반장님께서 집에 방문하셔서(시골집 마당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 있어요), 작업을 해주세요. 그럼 어느 주말 집에 도착하면 '서프라이즈~!' 우리 집 나무들이 완전 홀쭉해진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소나무 전정, 조경 작업 중에서도 꽤 까다로운 작업이라 합니다. 내 손이 닿는 소나무 가지를 대충 전정할 때도 3-4개 하는데 하루 종일 걸렸었거든요. 반장님 솜씨가 좋으신가 봅니다. 엄청 자란 솔잎 때문에 바람이 통하지 않아 시들한 표정에 벽처럼 서있던 큰 소나무 두 그루가 이제는 하늘을 품게 되었습니다. 처음 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소나무가 '해부되었다' 느낄 정도로 처음 보는 뼈대들이었어요. 솔잎 이불을 덮고 있을 때는 이렇게 몇몇 개의 굵은 가지들로 구성되어 있을 거라 생각 못했어요. 잘 전정된 소나무를 보니 의외로 심플합니다. 그리고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정말 멋져요.

한편, 이웃이 얼마나 고마운지 실감하게 됩니다. 처음 시골집에 들어왔을 때는, 주변 어르신들의 관심이 참 부담스러웠어요. 이웃과 거리를 두려고 대문 꼭꼭 잠그고 지내곤 했는데, 결국 내가 아쉬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이웃뿐이더라고요.


내 힘으로 살아냈다 생각한 어린 시절이 다른 면으로 재상영됩니다.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건 '나이 듦'의 좋은 점입니다.


'덜어내야 보인다' 라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집니다. 하늘을 품게 된 소나무가 정말 멋져요.
소나무 전정 before(올해 곡우 즈음) & after(올해 처서 즈음)
소나무 전정 (좌)셀프 & (우)전문가 손길


벌레가 사라졌다!

여름 내내 우리 아이들을 괴롭혔던 하얀 벌레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가지와 잎이 파이고 하얗게 변질된 부분이 남아있긴 하지만 가지에 매달려있던 하얀 형체, 잎에 바싹 붙어있던 꾸물꾸물 정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추운 기운에 생명을 다 한 것일까요? 아니면 더 따듯하고 습한 곳으로 일부 이동한 걸까요?

사라진 벌레들을 생각하며 문득 엉뚱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지구가 더 이상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게 될 때, 인간은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벌레가 사라진 텃밭 정원에 오랜만에 게으른 정원가의 손길이 닿습니다.

우선, 텃밭 정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손에 닿는 대로 잡초를 뽑아봅니다. 길만 터야지 하고 뽑다가 어느새 잡초 뽑기에 투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밭 일'이란 게 늘 이래요. 가볍게 시작했다 끝까지 가고야 마는, 땅이 발휘하는 어떤 '인력(引力)'이 있나 봅니다.  

큰 잡초를 대충 제거하고 고된 여름을 견뎌낸 아이들을 살펴봅니다. 토마토는 가지가 끊겨도 다른 가지를 뿌리 삼아 억세게 살아남는 아이인데, 이번 여름 벌레 공격에는 버텨내질 못했습니다. 나무껍질만 지지대에 붙어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어요. 오이, 호박 같은 덩굴 작물은 서로 엉겨 붙어 제 멋대로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도 아직 잘 살아있어 조심스럽게 덩굴을 정리하는데, 이때 꼭 실수를 합니다. 멀쩡한 덩굴을 잘라버렸어요. 새끼 오이가 예쁘게 자라고 있었는데 그만 생명줄을 잘라버렸습니다.


정원에 크게 자라 있는 장미, 백합, 라일락의 가지를 쳐줍니다. 어떻게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지 좀 스터디를 하고 실행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가위 가는 대로 감각적으로(?) 잘라봅니다. 도시에서 텃밭 처음 시작할 때 옆의 밭 고수님이 한 마디씩 해주셨던 말들, 그리고 동네 이웃분들이 걱정하시면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던 말들을 기억해내며 하나씩 해보는 거예요. 잘할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는데 그 경험들을 켜켜이 쌓다 보면, 우리 아이들과 교감하며 방긋 웃을 때가 있을 거예요.  

(좌) 거센 잡초 사이, 잘 있어준 정원 아이들과 (우) 끝낸 제거된 잡초 더미
장미, 백합 가지치기. 잘 자른 걸까요? 올해 겨울 전에 한번 더 가지치기 해보려고요.


(근데, 이번 늦여름은 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밭 벌레들이 사라진 것을 애도라도 하듯, 이름 모를 날벌레들이 집 안팎을 날아다녀요. 도시 집에서는 못 본 벌레예요. 산속 시골집은 의외로 모기나 파리 같은 벌레가 없는 편이거든요. 모리 파리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는데, 초파리도 아니고 모기도 아닌 것이 손 바람만 내도 쉽게 죽어버리는 이 병약한 벌레들은 도대체 어디서 계속 생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매 해 매 절기가 참 규칙적인 듯하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모습인 것이 참 오묘합니다.)


처서 즈음 이 구역 먹거리

밭 여기저기 저절로 자라난 깻잎과 올해 가장 큰 활약을 보여준 애호박


어느덧 가을 하늘!

하루하루, 매 시간마다 다른 모양으로 멋진 하늘을 선사하는 계절입니다.

입춘을 시작점으로 본다면(입춘을 시작으로 볼 수 있는 어떤 합리적인 근거는 없지만요), 반 바퀴 온전히 돌아 처음처럼 또 다른 절기들을 맞을 수 있는 '처서'입니다.

달리기를 할 때 처음 시작은 힘겹고 금세 포기하고 싶지만 오히려 중반 즈음이 되면 몸이 가벼워지고 계속 달려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곤 합니다. 이런 몸과 마음의 현상을 '러닝 하이(Running High)'라고 하더라고요. 이 '러닝 하이'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절기가 바로 처서입니다.


러닝 하이! 달릴만하다, 기분 좋게 완주할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는 때.
처서 즈음에 올해도, 이 생도 잘 살아낼 수 있으리라 용기를 내봅니다.
러닝 하이! 치열했던 여름을 지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합니다.




게으른 정원가의 '처서' 활용법

1. 고추 널고 맴맴, 잠자리 보고 맴맴

2. 전문가 초빙! 소나무 전정 작업

3. 잡초 제거하고 가지치고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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