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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금례 Dec 15. 2024

                                   

                                                         

  갓 지은 밥 냄새는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 오는 삼겹살 익는 냄새만큼이나 유혹적이다. 달고, 고소하고, 향긋하게 입안을 휘돌아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 마침내 영혼에 가 닿는 마법이다. 

 매끼 마다 밥 챙겨 먹는 것도 귀찮은데 한 알만 먹으면 되는 알약 같은 거 어디 없나? 그 밑 모르는 말을 흘리는 사람이 내가 아는 이들 중에 둘씩이나 있다. 솔직히 나는 저들의 말을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그들의 속도 믿지 않고, 저들의 입은 더 믿을 수 없다. 따져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 그 달콤한 밥의 유혹을 이길 재간이 내겐 없다. 밥 없이는 못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겐 이해 불가의 영역이다. 이런 나도 가끔 빵이나 다른 걸로 끼니를 때워 보려고 시도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밥 생각이 더 올라와 없는 밥도 찾게 된다. 결국 두어 숟가락이라도 밥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헛헛했던 뱃속이 진정된다. 밥 사랑이 너무 유난한가 싶기도 하지만 구조가 이렇게 생긴 것을 어쩌겠는가. 어차피 밥에 빠진 사랑, 더 사랑하는 것으로 밥에 대한 내 신의를 증명해 볼까 싶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욕망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말인즉슨 의식이 육체를 벗어날 때까지 욕망은 멈추지 않고 작동한다는 말일 것이다. 인간을 끌고 다니는 여러 욕망 중에 식욕이 첫 번째가 아닐까 한다. 식욕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우리 위장은, 속이 빈 체로 조용히 있는 성질을 가지지 않았다는 걸 우린 알고 있다. 위로 들어온 음식물이 제 역할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빈 위장이 되면 슬슬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울렁거리기도 하고, 쓰리기도 하고, 소리도 낸다. 어떤 위장은 천둥에 가까운 소리를 내서 제 주인을 당황스럽게 한다. 우리 몸이 익숙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위장도 늘 먹어왔던 음식에 안정을 찾는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양식은 밥이다. 

 수천만의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는 밥은 그 존재감만큼이나 종류도, 이름도 다양하다. 우선 밥을 짓는 곡물에 따라 나누어보면, 가장 친숙한 백미밥, 쫀득한 찰밥, 노란 기장밥, 고슬고슬한 조밥, 다채로운 잡곡밥, 구수한 보리밥, 등이 있고, 먹는 방법에 따라 볶음밥, 비빔밥, 김밥, 쌈밥, 덮밥으로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뿐인가 첨가물 재료에 따라 시래기밥, 홍합밥, 곤드레밥, 영양밥, 전복밥, 감자밥, 무밥, 버섯밥 .... 나물이든, 생선이든, 같이 넣고 밥을 지으면 그것이 그대로 밥 이름이 된다. 밥은 그 속성이 유순하고 포용력이 있다. 밥알 사이사이에 녹진한 성질이 있어서 서로서로 잘 엉겨 붙고, 또 어떤 것이든 잘 받아들여 다른 재료가 가진 장점이 녹아들 수 있도록 자기를 내어주는 겸손함도 갖추고 있다. 우리의 민족성인 겸양의 미덕을 밥이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밥은 다양한 효능과 이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의 일등 공신이 되어 주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흰밥의 당분이 비만의 주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한다. 이에 대해 강북 삼성병원 강재헌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며, 밥이 문제가 아니라 함께 먹는 반찬의 종류나, 조리법에 따른 식습관이 비만의 원인이다. 설탕이나 시럽, 포도당 같은 당류는 비만을 초래하지만, 쌀은 식이섬유와 단백질, 비타민 등을 포함한 복합 탄수화물로 적정량의 밥을 챙겨 먹는 건 오히려 건강에도,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잘 먹은 밥 한 끼는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비어있던 위장이 밥으로 채워지면 마음도 덩달아 너그러워진다. 이는 작은 쌀알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기능이 숨어있다는 뜻일 것이다. 쌀(米)이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두 개의 여덟 八자와 열 十 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가야 쌀을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쌀을 생명의 원천으로 귀히 여겼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바람과 물과 햇빛에 농부의 손길이 더해져 낱알 하나하나에 우리를 이롭게 하는 좋은 기능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밥은 장소나 분위기에도 민감하다. 어떤 곳에서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느끼는 행복감의 정도도 물론 다르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이 배경이 되는 자리에서 먹는 밥은 행복한 기억으로 뇌에 저장되고, 쉽게 잊히지 않는 한 페이지로 남는다. 국민학교 5~6학년 때쯤이었으니 약 오십 년 전쯤의 일이다. 해가 뉘엿해지고서야 어둠을 안고 들에서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위해 밥을 지었다. 

 그때의 나는 아버지 바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아버지께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뭐라도 시도해보던 때였다. 밥 좀 해 놓으라는 엄마의 말이 있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화르륵 타 들어가는 금빛 보릿짚으로 불을 때서 밥을 짓고, 파란 불꽃이 나풀거리는 석유 곤로에 부추 된장국을 끓였다. 어슴푸레한 기억이지만 생으로 부추를 한 줌 정도는 넣었던 것 같다. 제법 많이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부추가 익고 나니 건더기는 오간 데 없고 멀건 국물만 남아 있었다. 

 내가 만든 음식은 오십이 되기 전에는 음식이라 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 동생이 언니 이거 사람이 먹는 거 맞아? 했던 말이 귓전에 생생하다. 그때 내 나이 사십 대였으니, 열두세 살에 만든 그것은 내가 생각해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중머리 씻어 놓은 거냐며 엄마 특유의 화법으로 어록을 남기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야 맛있다. 우리 딸이 한 거라 너무 맛있다시며 엄지를 치켜올려 주셨다. 무한한 지지와 응원이 담긴 아버지의 목소리와 표정이 지금도 나를 따뜻하게 하고 든든하게 한다. 첫걸음마를 뗀 아이를 바라보는 대견함과 뭉클함이 아버지의 눈빛에 가득했던 그 날의 기억은, 내가 사는 동안 잊히지 않는 행복 그 이상의 시간으로 내 안에 깊이 저장되었다.

 오십이 넘으면서 신기하게도 내 손맛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제 전복밥이든, 시래기밥이든, 어떤 밥이든지 모양도, 맛도 제대로 만들어 낼 만한 솜씨는 갖춘 것 같다. 그런데 손맛을 보여드릴 아버지가 없다. 그저께 낯익은 정미소 이름이 적힌 묵직한 쌀 포대 두 개가 고향 냄새를 잔뜩 품고 올라왔다. 여기저기 단풍이 붉어질 때쯤이면 새하얀 햅쌀이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부모님은 떠나셨지만, 고향을 지키고 있는 후배가 농사를 지어 쌀을 보내오고 있다. 올해는 쌀에 기름을 두른 듯 유난히 밥이 반짝거린다. 

 오늘 밤엔 꿈속에서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싶다. 앙증맞은 뚝배기에 진한 멸치육수 붓고 칼칼한 된장찌개도 끓이고, 살아 계실 때 신장이 안 좋으셔서 드시지 못하셨던 짭짤한 간고등어도 앞뒤로 뒤집어가며 노릇노릇하게 바싹 구워야겠다. 맛있다, 맛있다, 참 맛있다. 체크무늬 짙은 갈색 점퍼를 입으신 아버지가 둥근 밥상 앞에서 부추꽃처럼 하얗게 웃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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