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Dear Dr. K에게

Dear Dr. K,


한국인은 참 변화에 적극적이고 적응도 잘하고, 대응력도 좋습니다. '빨리빨리DNA'가 이룬 성취는 엄청납니다. 자고 나니 선진국이 되었다는 말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역재생' 분야도 선진국이 되었다고 봅니다. 해외사례를 수입해 한국에 적용해야 하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선진사례나 기술을 배워 빠르게 따라잡는) 단계가 아니라, 이미 따라잡을 사례가 없어 새롭고 독자적인 한국의 사례를 오히려 다른 나라가 배워야 할 단계이지요.

 

4~5년 전만 해도 일본의 마치즈쿠리(지역재생)에 대해 배워야 할 선진 사례라고 생각하고 연간 2~3회씩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일본의 마치즈쿠리 지역의 활동가, 공무원, 주민들에서 본  '잇쇼켄메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잇쇼켄메이는 '한 곳(장소)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뜻으로 장인정신 같은 것이죠.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기 직전에 가본 일본의 마치즈쿠리 현장은 내게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느낌이라고 표현한 것은 데이터에 근거해 분석한 것이 아니고 직감적인 것이라 그렇습니다. 여전히 일본의 마치즈쿠리는 배울 점도 있었지만, 왠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꼰대의 고집 같은 마치즈쿠리로 보였습니다.


일본의 마치즈쿠리도 아베 정권 시기에 총리실 산하 지방창생본부를 설립하고 여러 제도와 지원정책을 만들어 정책적 혁신을 도모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치즈쿠리 현장들도 실천적 혁신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그들의 혁신이 갈라파고스적 혁신으로 보였습니다. 찰스 다윈이 가본 갈라파고스의 생물들도 진화는 했습니다. 물론 갈라파고스 생물들의 진화는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독립적인 진화였습니다. 저는 일본의 마치즈쿠리가 잇쇼켄메이 전통과 만나 갈라파고스식 혁신만 거듭한 지역재생으로 보였습니다. 토마스 쿤이 지적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는 '파괴적 혁신'을 그들의 지역재생 현장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잇쇼켄메이의 전통에 근거한 혁신(갈라파고스적 혁신)은 일본의 다른 분야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혁신으로 인해 반도체 강국 일본의 무너졌습니다. 반도체 기술과 시장을 선도하던 일본의 소니, NEF, 도시바, 미쓰비시, 후지쓰 같은 기업이 유행에 대응하지 않고 기술적 혁신만 고집하다 갈라파고스의 함정에 빠져 무너졌듯이 말입니다.


그에 비해 한국은 패스트 팔로워 방식으로 세계 최고의 반도체 선도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서 반도체 사업을 권유한 사람이 일본의 기업가라고 합니다. 권석준의 [반도체 삼국지]와 오시미 슌의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읽으면 더 잘 이해되실 겁니다.


저는 지역재생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활동가인 저도 그랬고, 한국의 수많은 인재들이 일본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마치즈쿠리 정책과 현장을 배워와서 한국에 적용했지요. 활동가나 전문가만 배우러 다녔을까요? 지역재생 현장의 주민들도 일본 사례를 배우러 많은 분들이 수년 동안 일본을 방문했지요. 일본은 한국에 있어 산업,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재생도 벤치마킹하고 패스트 팔로워 할 사례였지요.


역시 한국인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은 문재인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 거치면서 더 이상 일본에서 지역재생의 사례를 패스트 팔로워 하지 않아도 될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도시재생 뉴딜의 성공 여부, 호불호를 떠나서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세계 어느 국가가 매년 100곳씩 5년간 500곳 이상의 지역에서 수십조 원을 투입하면서까지 지역재생 사업을 했습니까? 여기에 어촌 뉴딜 300과 다른 정부 부처의 지역재생 플랫폼 사업을 합치면 대한민국은 어마어마한 사회혁신 실험장입니다. 규모, 사례 수, 경험과 노하우 측면에서 이미 한국의 지역재생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 보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직도 해외에 비해 부족하고 비판할 지점이 많지만, '제 눈에 들보'라고 조금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지역재생에 성공했다고 하는 해외사례도 꼼꼼히 들여다보면 많은 문제가 보입니다.


문제는 따라잡을 상대가 없는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한국의 지역재생이 잘 되어 간다고 보지 않습니다. 더 창조적으로 지원정책을 촘촘히 짜고, 현장의 역량을 더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해외사례를 카피 떠서 가져올 수준은 넘어섰지요. 그동안 일본의 리노베이션 스쿨(한국에서는 DYI), 마치즈쿠리주식회사, 택티컬 어버니즘, 커뮤니티 재생 등이 한국에서 한 때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유행으로 그친 이유도 더 이상 일본의 그것이 한국의 지역재생 시장에 맞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일본 마치즈쿠리의 사업들도 일본문화를 개방했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 한때 유행했던 일본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 J팝과 같은 운명이라고 봅니다.


요즘 지역재생을 이야기하는 공식, 비공식 자리를 가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관계인구'라는 신앙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해수부의 신어촌활력증진사업에서는 사업성과로 '관계인구'의 유입을 명문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관계인구'도 철 지난 일본식 지역재생 상품을 한국에 억지로 도입해 적용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계인구'라는 일본식 개념과 방법론을 말입니다. 관계인구라고 표현하지 않았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그러한 지역재생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있었다는 걸 누구보다고 박사님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과잉, 개념 유행의 시대입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DNA는 유행을 단순히 쫓아가지 않았습니다. 유행을 배워 적용하되, 언제가는 유행을 선도하겠다는 염원이 담긴 DNA입니다. 한국의 지역재생은 지방소멸에 대응하는 사회혁신의 리빙랩입니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다양한 곳에서 지역재생의 시도한 한국이 일본과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물론 일본 등 해외의 정책, 사례를 무시하고 배척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배울 것은 배우고 도입할 것은 도입해야죠. 다만, 대단히 새로운 것처럼 포장해서 영업하는 일부 전문가들의 모습에서 비애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한국의 지역재생 사례를 일본어로, 영어로 번역해서 해외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 비해 지방소멸에 대응하려는 의지도 없어 보이고, 정책플랫폼도 허술합니다. 큰 틀의 비전 없이 개별적 아이템으로 지역 문제를 다루려 합니다. 많은 인재들이 이 개별적인 정책 아이템에 휘둘리고 있지요. 저는 윤석열 정부 5년 동안 지방소멸에 대응하는 진짜배기와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 나눠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국민은 '지역재생'을 해외에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사례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전 20화 Dear mayor of S.City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