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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an 21. 2022

리버풀 민박 1

1. 그날 아침, 나는 달라졌다

  그날 아침, 나는 달라졌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알람이 울리고 눈을 감은 채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갔다. 샤워기 밑에 서서 뜨거운 물을 틀고 한참 물을 맞으며 서 있었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지겹다 이런 아침, 또 출근이라니, 지겨워, 생각했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 대충 머리를 감고 수건을 두른 채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이상했다. 뭔가 미묘하게 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눈에 띄는 것들은 그대로였다. 주방 싱크대에 얹어둔 유리컵, 반쯤 찌그러뜨린 맥주캔, 흘러내린 국물 자국이 있는 플라스틱 용기. 그래 뭐가 다르겠어. 그냥 그대로지.퇴근해서 치워야겠다.

  드라이를 하려고 화장대 앞에서 섰다. 그러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순간, 의아했다. 내 발등, 검게 탄 발등에 하얀 샌들 자국이 나 있었다. 30대 이후로 샌들을 신고 햇볕 아래를 걸어본 적이 없는데, 집과 직장만 왔다 갔다 하느라 햇볕 쬘 일이 없는데 까만 발등에 흰 샌들 자국이라니, 언제 이렇게 된 걸까. 설마 형광등에도 살이 타나? 근데 팔도 얼굴도 아닌 발등만 이렇게 선명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거울을 보는데 얼굴이…… 달랐다. 뭐지? 당황해서 거울 가까이 얼굴을 대고 다시 살펴보았다. 확실히 달랐다. 광대뼈 근처가 도톰하고 턱선이 날렵해져 있었다. 팔자 주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거울에 비치는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곳의 나는 눈동자가 또렷했고 심술궂게 처진 볼살과 지친 눈매가 사라졌다. 전체적으로 아래로 처지는 기운 대신 앞으로 혹은 위로 올라붙은 느낌. 찡그리듯 웃어 보았다. 눈가에 주름이 아주 얇고 짧게 잡힐 뿐이었다. 웃는 얼굴이 근심 없이 진짜 같아 보였다. 이건 내가 아닌데. 나는 이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요즘의 나라면 더욱. 나는 집과 회사만 오가며 하루 한 번도 제대로 웃지 않았다. 이런 얼굴, 이런 표정이 나올 리가 없잖아.

  혹시나 싶어서 귓불을 거울 가까이 대고 확인해보았다. 구멍이 각각 한 개씩, 두 개뿐이다. 스물아홉 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더 나이 들기 전에 투핀 귀걸이를 해야겠어, 나이 들어선 못하잖아, 친구와 술 마시다 말고 액세서리 가게에 가서 왼쪽 귓바퀴를 뚫었었다. 근데 지금 귀에는 구멍이 한 개씩밖에 없다. 이렇게 흔적 없이 막힐 리는 없는데.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웃옷을 걷어보았다. 배꼽 주위가 깨끗했다. 이상해, 이건 확실히 이상하다. 나는 스물여섯에 담석 수술을 했다. 복강경 수술이라 상처는 크지 않아도 배꼽 아래와 오른쪽 위에 흉터가 선명하게 남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없다. 이게 뭘까. 발등에 샌들 자국이 하얗고 얼굴에 주름도 없고 귀걸이 구멍 하나가 사라지고 배에는 상처도 없다니, 이건 내가 아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살이 물렁하지 않았다. 머리도 가르마가 하얗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서른둘에 한 아이라인 문신도 없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이건 지금 내 몸이 아니다. 지금의 내 몸, 아니 어제까지의 내 몸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 상태는 훨씬 이전의 나여야 가능하다. 아마도 스물여섯 이전? 그 즈음엔 아마 이랬을 거다. 근데 왜? 지금 왜 이런 모습일까.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예전의 얼굴, 예전의 몸이라니. 내가 아직 잠에서 덜 깬 건가. 아님 설마 진짜 과거로 돌아가기라도 한 건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당황스러운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날짜는 확실히 어제의 다음날이 맞았다. 과거는 아니다. 꿈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나는 달라졌고 그건 확실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분명히 변하긴 변했는데 그게 뭔지, 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아무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자. 뭔 일이든 일단 출근은 해야 한다. 내가 20대가 아니라 십대가 된다 해도, 어쨌든 출근은 해야지. 좀 많이 어리둥절하지만 어쨌든, 일단 가면서 생각해보자.


  전철 안 손잡이를 잡고 다섯 번쯤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이게 꿈이라면, 그래 꿈이라도 괜찮다. 꿈이든 생시든 출근하는 중이니까 어느 쪽이든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가 되짚어 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다른 날들과 똑같이 퇴근해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TV를 켜놓은 채 멍하니 보고 있었을 뿐이다. 1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그래왔다. 맥주를 홀짝이며, 맵고 짠 음식을 집어 먹으며 멍하니 화면을 보고 그러다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음 주도, 다음 달도. 내가 바라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 뭐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바꿀 수 있는 게 있고 바꿀 수 없는 게 있다. 바꿀 수 있는 때가 있고 바꿀 수 없는 때가 있다. 나는 모두 후자라고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오래 마음을 쓰지 않기로 이미 오래 전에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어제도 그랬다. 잠깐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늘 그렇듯 나는 무시했고 아무 일 없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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