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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an 26. 2022

리버풀 민박 5

5. 회사를 그만두다

  그 기분이 깨진 건 삼 개월쯤 지나서였다. 겨울옷을 끄집어내고 얇은 옷들을 집어넣느라 옷장을 헤집어보니 세 달간 사들인 꽃무늬 원피스와 뷔스티에 원피스, 미니 핸드백, 미니 카디건, 프릴블라우스, 청바지와 후드티 따위가 수십 벌이 넘었다. 문득, 이게 다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옷장을 바꾸려고, 옷 입는 스타일과 화장법을 바꾸려고 그토록 간절히 과거로 돌아가길 바랐던 건가. 삼 개월 동안 내게 생긴 변화란 게 겨우 사고 또 사고, 보여주고, 확인받고, 돈을 쓰자고 마음만 먹으면 진즉에 다 할 수 있었던 그런 것밖에 없었단 말인가. 한때라도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무언가 하고픈 게 있었을 텐데, 겨우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닐 텐데. 20대 밖에 못하는 무엇, 40대는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텐데 삼 개월 만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밤마다 멍하니 TV를 켜놓고 앉아있던 그때, 나는 기회만 된다면 내 삶을 한 번 휘저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밑바닥에 손을 깊숙이 밀어 넣고 위 아래로, 수평으로 크게 움직여 전체가 다 달라지도록 헤집어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삼 개월이 지난 후 나는 무얼 하고 있나. 변함없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이전보다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이렇게 별일 없이 살다가 주민등록증의 나이에 따라 퇴직하고 그냥 나머지 시간을 흘려보내게 된다면, 도대체 뭘 위해 그토록 돌아가길 원했던 건지 나도 끝내 모르고 마는 셈이 된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근본적인 변화가 뭘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는데 어디가 처음이고 어떤 게 시작일까. 내가 가장 원하는 것, 그런데 나이 때문에 이제는 늦었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게 뭘까. 지금의 직장, 지금의 위치, 지금의 관계, 다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쁘진 않지만 이런 걸 원한 적은 없다고 고개를 저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릴 땐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거라도 어디냐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그나마 있는 게 다행이라고 애써 위로하고 머리를 털며 잊으려 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래, 지금처럼 사는 걸 그만둬야겠다. 아침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짜증과 불만과 분풀이를 받아주다가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것부터 그만하고 싶다. 주민등록증의 나이는 40대 그대로지만 체력과 외모가 20대라는 사실이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게 누구나 꾹 참고 꾸역꾸역 버텨낸다면 결국 얻을 수 있는 자리라는 것도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전문직처럼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자격을 얻을 수 있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나가야 다음 단계의 문이 열리고 또 그 다음 단계의 문이 열려서 올라갈 수 있고, 뭐 그랬다면 그만두는 걸 심각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나는 계약직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허울만 팀장인 걸. 건강과 체력이 받쳐줘서 오래 버틸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겨우 삼십 만원 남짓의 월급 차이. 오랫동안 바라고 또 바라면서 기적처럼 되돌린 시간의 가치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차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계산해보았다. 전세보증금, 적금, 은행잔고, 연금저축, 보험금……. 장사를 하거나 새로운 일을 꾸미기엔 어림도 없는 금액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생활비로만 쓴다면 오 년 남짓도 버틸 수 있는 돈이었다. 까먹지 않고, 아니 탕진하지 않고 조금씩만 쓴다면 나쁘지 않다. 이십 년 전의 몸으로 돌아갔으니 앞으로 이십 년간은 어디 크게 아파서 병원비가 필요하거나, 골골대며 소소한 약값과 치료비를 들일 일도 없을 거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특별히 아픈 데가 없었으니 남들 나이 60대까지는 건강할 예정인 셈이다. 60대 이후에도 남들 중년 때만큼은 건강할 거니까 목돈 들어갈 일은 없을 거고, 그것만으로도 지금 오 년 정도 아무것도 벌지 않는다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내게 시간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이래저래 안 되면 원래대로 콜센터에 취직하면 되는 거다. 체력이 받쳐줄 테니까 몸 쓰는 알바도 그럭저럭 버틸 만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좋은 직장은 드물고 모두가 계약직으로 일하고 재계약하고 다시 계약하는 세상, 십 년쯤 지나면 다 똑같을 거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부장은 그러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고 만류했다. 주위에서도 무슨 일이냐고, 요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긴 했다고, 좋은 일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해보라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꼭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일이니 우리 팀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더니 모두들 그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부장에게도 만류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더니 원래 누구든 한 번은 잡아줘야겠다고 부장이 되는 순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말일까지 꽉 채워서 근무한 후 퇴직 처리를 했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그래도 모두들 서운하다고, 잘 지내라고 인사해줘서 고마웠다. 어렸을 때는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하면 확 사표를 던지거나 욱 들이받고 다음날부터 종적을 감추는 걸 상상했었는데, 역시 그런 건 어릴 때나 갖고 있는 로망이지, 퇴직은 그저 부서 변동이나 근무처 이동처럼 그저 그런 정도의 행정적 절차가 필요한 일일 뿐이다. 회사를 나오면서 그래도 한 번쯤은 내가 스스로 그만두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통보받지 않고, 슬금슬금 밀려나는 경험도 하지 않고 내가 결정해서 나올 수 있다니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믿기지 않은 기적이 내게 찾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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