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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an 27. 2022

리버풀 민박 6

6. 스무 살의 버킷 리스트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이, 다시 스무 살 때처럼 미래가 열려 있었다. 나는 오늘부터 어느 방향이든 내키는 대로 가면 된다. 팔을 뻗어 지난밤에 끼적여 놓은 메모를 집어 들었다. 무모해도 도전, 아무거나 도전, 실패해도 상관없으니까 아무거나 하자. 그 옆에는 나라 이름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콜롬비아, 몽골, 라오스, 조지아, 터키. 안데스 산맥 걸어서 넘기, 방콕에서 한 달 살기, 멕시코 피라미드 위에 앉아서 일몰 보기, 카일라시 산을 돌며 오체투지 하기. 아주 세계 여행을 떠날 태세구만. 제과제빵 배우기, 요리 유학, 한식 자격증 따기. 이건 새로운 직업 탐구 과정 중에 나온 것일 테고. 텃밭 가꾸기? 맞다. 귀농을 할까 뭐 그런 생각도 잠깐 했었지. 지금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두서없이 마구 뒤섞여 나오는 시기인 것 같다. 하루에도 열두 번 생각이 바뀌고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 중에서 뭔가가 걸러지고 뭔가가 남겠지. 지금은 잠시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일단 다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잠도 조금 더 자고.

  전에는 아침 6시면 정확하게 눈이 떠졌는데, 심지어 5시 45분만 되어도 눈이 떠졌는데, 어느새 일어나면 10시,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오후 2시에 일어나기도 했다. 왠지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고 하루의 길이도 짧아진 것 같았다. 대신 밤이 길어졌다. 마트에 가서 맥주를 짝으로 사다놓고 매일 밤 세 캔씩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양이 늘지는 않았다. 그냥 딱 세 캔. 그동안 못 보았던 영화를 육칠십 편 보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아파트 근처 공원에 산책을 가보았고 항상 중학생들로 바글대는 떡볶이 집에 오전에 가서 한가롭게 어묵 국물을 마시고 돌아오기도 했다. 예전에 다니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건물들도 한 번씩 둘러보았고, 어릴 때 살던 아파트 단지까지 가서 내가 살던 데가 몇 동이었더라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평일의 박물관 어두운 의자에 앉아 유물 뒤편의 벽면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고 미술관까지 가서 건물 사진만 찍고 돌아온 날도 있었다.

  딱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는 날은 도서관에 가서 서가에 꽂힌 책들을 손바닥으로 주르륵 쓸어보았다. 의외로 오전의 시립도서관 종합자료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창가에 기대어, 바닥에 쪼그려, 서가 옆에 서서, 책상에 비스듬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나이도 외모도 성별도 다양했지만 모두들 굼떠 보였고 모두 혼자였다.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직업도 돈도 없이, 오직 책에서 위안을 얻고 책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 사람들과 함께 서가 사이를 서성거리며 책을 꺼내고 잠시 뒤적거리다가 다시 꽂아놓고, 다시 꺼내어 읽고 꽂아놓고를 반복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면 때론 눈이 내리고 있었고 때론 비가 내리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루 중 기억나는 순간은 극히 짧았다. 창틈에 말라붙어 있는 잠자리 날개 한쪽을 물끄러미 바라본 것, 옆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사람의 하늘색 컨버스화, 도서관 지하 식당에서 우동을 먹다가 문득 손톱을 보니 많이 자라 있었던 것, 커피 자판기 앞에 서서 코코아 버튼을 눌렀는데 율무차가 나왔던 것. 하루에 한 가지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어느새 햇볕이 꽤 따뜻해져서 한낮에는 스웨터를 입은 등에서 땀이 배어나오기도 했다. 어느 저녁,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서관을 나와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날이 아직 환했다. 땅거미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시간인데 이상하구나. 시계를 잘못 봤나. 나무들 옆을 걸어가는데 달짝지근한 흙냄새가 났다. 나무줄기에 까맣게 물이 올라 있었다. 줄기 끝에는 어느새 어린잎이 손톱만큼씩 돋아서 둥그스름한 나무의 윤곽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걷다가 한참만에야 깨달았다. 봄이구나!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니 검은 코트를 입고 스웨터를 입은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목덜미가 축축해진 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다. 달력을 확인해 보니 회사를 그만둔 지 네 달이 지나 있었다. 지난 네 달 동안 나는 뭘 하고 지낸 거지? 애초에 뭘 하려고 했더라……. 시간이 흐르면 뭔가 걸러지고 뭔가가 남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럼 지금, 어떤 알맹이가 남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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