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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an 30. 2022

리버풀 민박 7

7. 다른 사람이 되려면 다른 곳에 가야 한다

  다음날, 아침부터 이불 빨래를 하고 구석구석 대청소를 했다. 침대 밑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베란다에 수돗물을 부어 바닥을 빗자루로 싹싹 문지르니 구정물이 흘러 나왔다. 창문을 모두 열고 장롱과 서랍장, 싱크대까지 모든 활짝 열어 환기를 하고 냉장고 선반을 하나하나 빼내어 물로 씻었다. 깨진 계란 흰자가 끈끈하게 묻어 있고 김칫국물과 간장 얼룩이 그릇 바닥 모양대로 둥글게 나 있었다. 겨울옷도 다 집어넣어버려야지. 옷장을 열어 코트와 스웨터, 목도리 따위를 있는 대로 끄집어내다보니 문득 이게 다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뭘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 옷장 정리나 하고 있을 땐가.

  네 달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단지 생각을 좀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생각의 알맹이는 뭐죠? 아…… 그게……. 여전히 나는 말줄임표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린다고 정리되고 해결될 거였으면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게 수월해지고 편안해져야 맞는데, 실제로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들만 뒤죽박죽 쌓이고 후회만 거듭하게 되지 않았나. 그래서 결국, 진작 그때 뭐든 했어야 했다고 한숨 쉬며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지 않았던가. 다시 20대가 된다면, 제발 다시 20대가 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어요.

  그게 채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아직도, 또 다시 이러고 있다니. 이렇게 흐지부지 이십 년이 다 흘러가버리면 그땐 무얼 팔 건가. 다시 팔 영혼이 남아 있기는 할까. 이렇게 굼벵이처럼 꾸물꾸물, 늘 미지근한 내 방과 어두컴컴한 도서관에서 이십 년을 하루같이 몽롱하게 보내다 시간이 다 지나가버리면, 그땐 이미 사회적 나이는 노인이 되어 있을 거고, 차라리 그냥 회사나 다닐 걸 그랬어, 이십 년이 하룻밤 꿈과 같았어, 그닥 재미있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길고 지루한 꿈. 인생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참 허무하구나. 가슴이 먹먹해지며 헤어 나오지 못할 무기력에 빠지지는 않을까. 그때 가서 60대가 되어버린 주민등록증을 보며 이십 년의 젊음을 다시 누린 게 아니라 단지 중년의 이십 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아무 가치 없고 의미 없는 젊음만 두 번 겪었을 뿐이라고 씁쓸하게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건 최악이다.

  결국 답은 분명하다. 지금 당장 달라지지 않는다면 끝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회사를 그만 둬도 같은 집, 같은 생활 반경에서 사는 이상 비슷한 패턴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전과 똑같이 살면서 달라지길 바라는 건 너무 막연한 낙관이고,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면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을 해야 한다. 몸에 배어 있는 생활습관이나 취향을 버릴 수 없다면 삶의 공간을 옮기는 것도 방법이 될 거다.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맥락일 테고, 조금 더 과감하게 저질러보자면 아예 눌러 사는 건 어떨까. 한두 달 구경하고 익숙한 나의 집으로 돌아와 ‘그 여행은 즐거웠어.’ 라고 회상하는 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아는 사람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내는 거다. 일 년이든, 이 년이든, 정말 다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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