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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Feb 02. 2022

리버풀 민박 8

8. 리버풀, 비틀즈의 도시

  어디로 어떻게 갈까 생각해보았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제주 한 달 살기, 런던 한 달 살기,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 등 낯선 곳에서 한 달씩 사는 게 유행인가 보았다. 초기에는 방학 때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처럼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맘껏 쉬다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괌, 필리핀처럼 어학연수를 겸할 수 있거나 로마처럼 유적지를 탐방할 수 있는 곳이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가 있는 것도,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도, 역사나 건축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한 달만 살다 돌아올 것도 아니었다. 한 달은 가방을 채 풀기도 전에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다. 몸살이라도 호되게 앓고 나면 체류일자의 반이 지나 있고, 문 닫는 시간이 들쭉날쭉한 저 식당에서 꼭 저녁을 먹어보리라 결심만 하다가 끝나버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 곳에 머무는 시간이 적어도 일 년은 넘어야 한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렇다면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아무리 준비하고 조사해도 모든 경우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을 거고 일단 여기가 아닌 곳에 가는 게 중요한데……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조금이라도 내키는 곳,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였더라…….


  그때 문득 리버풀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나는 비틀즈의 팬이었다. 내가 비틀즈를 알았을 때 이미 그룹은 해체된 지 수십 년이 지났고 존 레넌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또래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건 낡은 테이프를 듣고 또 듣는 것뿐이었다. 음악은 눈물 나게 아름다웠지만 나는 나날이 외로워졌다. 세상에서 제일 비통한 게 뭔지 알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살아있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너희들은 이런 기분 절대 모르겠지. 교실 구석자리에 앉아 반 아이들을 질투했고 홀로 절망했다. 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린 걸까. 이제 나는 영영 비관론자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랑하고 과감하게 사는 건 아마 불가능할 거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왜 나는 하필 여기서 태어났나. 리버풀이나 런던이나 뉴욕이 아니라 왜 여기서. 그리고 다짐했다. 내게 소원이 있다면 죽기 전에 리버풀에 가보는 거야. 애비 로드를 걷고 페니 레인 표지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캐번 클럽 입구를 서성일 거야. 어디선가 리버풀이 벤치의 도시라는 기사도 읽었다. 정말 낭만적인 곳이로구나, 리버풀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벤치, 저 벤치에 앉아만 있다 와도 충분하겠구나. 잔디밭에 햇빛이 드리워지는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꿈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랬던 내가 대학에 진학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여기저기 낯선 곳을 다니며 안 읽던 책을 읽고 안 보던 영화를 보고 엇비슷한 듯 다른 일들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비틀즈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이제야, 정말 오랜만에 그곳을 떠올렸다. 리버풀, 리버풀.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내 머릿속 리버풀은 오래된 사진처럼 몇 개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퇴락해버린 노동자들의 도시. 텅 빈 공장들이 늘어선 항구, 색 바랜 벽돌 건물들 옆을 지키는 잿빛 바다, 과묵한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날 결심을 하는 곳. 주말이면 축구장이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눈을 내리깔고 쓸모없는 인사말 따위는 아껴둔 채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가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비틀즈의 도시. 십대 때의 꿈이 수십 년이 지나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리버풀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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