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만의 리버풀 민박
한 달 후 웬만한 정리는 끝났다. 집은 나름 역세권이라 기한 전이라도 금세 나갔고 돌려받은 전세보증금은 리버풀 어학연수를 다섯 번은 다녀올 수 있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아니, 리버풀을 다섯 번 다녀오면 없어져버릴 작은 금액인 건가. 베란다에서 바로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런 곳에 이런 건물이 있나 싶게 바닷가 옆에 뜬금없이 우뚝 솟은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꽤 있었다. 한적한 별장으로도 좋고 관광객들에게 잠깐씩 빌려주면 본전은 건질 수 있을 거라고 광고들을 한 건지 많은 집들이 주인 없이 비어 있었다. 지금 당장 들어와도 되고 전세 계약도 좋고 월세도 가능, 매매도 가능, 뭐 그런. 방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방도 있고 작은 거실도 있고 주방도 있고 해서 오히려 휑할 지경이었다. 천정에 긴 백열등이 달려 있고 벽이 온통 하얀 데다 바닥은 어설픈 나무색깔인 전형적인 한국식 인테리어. 영국처럼 보이는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데 여기를 리버풀이라고 우겨도 될까. 리버풀에 ‘리’라도 가당키나 한가. 계약을 하면서 갑자기 울적해졌다. 결국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그저 멀리 밀려온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여기가 리버풀이라고 내가 나를 어떻게 속여 넘길 수 있을지, 내가 속아 넘어갈 수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리버풀 스튜디오는 오버고 그렇다고 리버풀 호텔도 아니고, 리버풀 모텔이라기엔 이름부터 너무 싼티가 난다. 모텔이라니, 차라리 여인숙이라고 하지. 그 순간 ‘리버풀 민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조차도 어이가 없어서 풉 웃어버렸지만 두세 번 되뇌다 보니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사는데 호텔은 가당치도 않고, 모텔은 리버풀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차라리 리버풀 민박이라고 하면 홈스테이 같기도 하고 뭔가 소박한 현지 분위기가 난달까, 그럭저럭 나 정도는 속여 넘길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로망 ‘리버풀’에 강원도 바닷가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민박’의 결합, 딱 좋네. 뒤죽박죽 우습고도 진지한 내 상황과도 맞아떨어지고, 세상 어디에도 없을 내 공간으로 딱이로구나. 그래, 이제 리버풀 민박으로 가는 거다.
가구와 전자제품은 보관업체에 맡기기로 했다. 이제 짐만 싸면 되는데, 리버풀에서 이 년 동안 지내는 데 뭐가 필요할지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불 같은 짐을 미리 부칠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거창하게 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거창하게 시작하면 뒷수습도 거창해진다. 심플하게 시작해서 심플하게 끝내는 게 낫다. 일단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그때 가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날이 추워지면 옷을 사면 되고 생필품이야 세계 공통 대형마트가 해결해줄 거다. 수하물로 맡길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여행용 가방을 사서 청바지와 레깅스, 티셔츠, 점퍼, 샌들 따위를 집어넣었다. 옷장 가득한 나머지 옷들을 그대로 보관업체에 맡기자니 과연 이 년 후에도 이 옷들을 입게 될지 의문이 들었다. 유행이 지나서, 취향이 변해서, 어울리지 않게 되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보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당장 다음 달도 예상하지 못하는데 이 년 후를 기약하며 창고에 하염없이 넣어두는 건 바보 같은 일이 아닐까. 그래, 일단 최소한만 남기자. 출근용 투피스와 블라우스, 구두, 정장용 핸드백 정도만 남겨놓고 나머지들을 싹 다 모아서 아름다운 가게에 갖다 주었다. 진작 이렇게 훌렁한 옷장으로 살 수도 있었는데 필요 없는 것들을 너무 오래 안고 살았다.
며칠 간 여행용 가방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자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평상시에 이렇게 살았다면 인생이 지루하다는 얘기는 안 했을 텐데, 어쩌면 모두 용기가 없었던 내 탓이다. 다시 시작하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었다. 다만 미루고 미뤘던 것뿐이지. 아무튼 다행이다. 이제라도 이렇게 무모할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