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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Feb 04. 2022

리버풀 민박 9

9. 내가 원하는 리버풀

  일주일간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했다. 영국 비자, 영국 무비자, 영국 체류 비자, 영국 학생 비자, 영국 어학연수, 리버풀 어학연수, 리버풀 어학원, 리버풀 어학연수 비용, 리버풀 홈스테이 비용, 리버풀 스튜디오 플랏 비용……. 궁금한 게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터라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별 문제 없이 일 년 정도 체류하려면 어학연수가 가장 안전한 선택인 것 같은데, 근데 진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건가? 출석률이 저조하면 안 되고, 게다가 홈스테이? 멀리까지 가서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진 않은데……. 내가 진짜 스무 살도 아니고 주인 아주머니가 해주는 밥 먹고 시간 맞춰 학원 가고 예습하고 복습하고, 아니 그건 좀……, 그건 좀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알아보자니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일 년 리버풀에 사는 대가로 이 년간 번 돈을 꼬박 들여야 한다니 이게 괜찮은 선택인 걸까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무모한 건 아닐까. 비용을 투자한 만큼 영어 실력이 는다 한들 사회생활 갓 시작한 진짜 20대도 아니고 내가 어디 가서 그걸 써먹겠나. 영어로 상담해주는 콜센터에 취직한다면 또 모를까, 그럴 일도 없겠지만 설사 그런다 해도 그냥 콜센터보다 임금이 확연히 높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나름 부드럽고 원만하게 불만을 처리해내는 우수 사원이었다. 어디 가도 미숙하단 말은 듣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일 년 만에 그렇게 돈을 써버리면 미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아껴 쓰면 오 년은 버틸 수 있지만 생각 없이 쓰면 이 년도 못 버틸 거다. 그냥 확 저지르기엔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 리버풀에 가야 하는데, 가고 싶은데, 가도 될까. 안 가는 게 차라리 나을까. 머리가 무거워져서 침대에 누워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비자 체류가 가능한 곳은 없는지 처음부터 다시 찾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30일, 포르투갈 90일, 페루 90일, 캐나다 180일…….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왕복 항공권을 들고 입국심사대를 통과한 후의 얘기지, 말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여행자처럼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짐을 싸서 돌아다니고 싶진 않았다. 한 곳에서 적어도 일 년은 머무르기로 마음먹지 않았나. 그럼 어쩔 수 없이 어학연수 비용이 좀 저렴한 다른 나라들을 알아봐야 하는 걸까.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하지만 그곳들은 리버풀이 아니다. 리버풀에서 너무 멀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리버풀인데, 리버풀도 아닌 곳에서 영어공부까지 하면서 살아야한다니, 그건 애초의 계획에서 너무 멀고 도무지 억지스럽다.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맴돌며 내가 원하는 최소한의 조건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단 리버풀. 그래 그건 알겠고 리버풀에도 원하는 조건이 있을 거니까. 조용한 혼자만의 방, 본격적인 요리까진 아니어도 뭔가 따뜻한 걸 해먹을 수 있는 조리시설, 조그맣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리버풀은 항구도시니까 한 번씩 산책할 수 있는 바다. 그래, 소박한 바람이네. 이렇게 소박한데 그곳에 가기 위한 준비와 그곳에 가서 해내야만 하는 과정이 그토록 복잡하다니 그야말로 주객전도 아닌가. 리버풀에 가서 영어와 씨름하며 영어에 파묻혀 허우적거려야 한다면 여기 한국의 독서실에 일 년간 틀어박혀 공부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어학연수 준비하면서 몇 개월을 보내고, 어학원에 적응하느라 또 몇 개월을 보내고, 그렇게까지 하다보면 이미 리버풀은 내가 생각했던 그 리버풀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뒤늦게 이게 아닌데 싶어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회사 다니며 어영부영 보낸 시간 삼 개월, 빈둥거리며 보낸 시간 사 개월, 그리고 다시 몇 개월, 그대로 일 년이, 이 년이, 이십 년이 훅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 뭐가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마냥 흘려보내는 게 제일 젊은이다운 모습일 수도 있겠다. 그래, 그렇게 바보같이 허둥대다가, 빈둥대다가, 내 젊음도 다 지나가버렸지. 그래도 다시 그걸 반복하는 건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똑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는 말아야지. 정신 차리자.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생각해보자.    

  

  내가 원하는 건 리버풀. 그곳에서 바라는 건 혼자만의 방과 조리시설, 라디오, 바다, 딱 네 가지뿐이다. 그렇다면 순서를 바꿔서 그 네 가지 조건부터 맞추는 건 어떨까. 그 네 가지를 갖춘 곳으로 가면 그곳이 리버풀이고, 리버풀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고, 리버풀에서처럼 살면 되는 거지. 행정구역 리버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머릿속 리버풀이 중요한 거니까. 거기에 비틀즈까지 얹어준다면 금상첨화, 완벽하지 않을까. 조용한 바닷가 방에서 따뜻한 스프를 마시며 비틀즈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끝없이 리플레이하는 거다. 꿈속에서도, 바닷가를 걸을 때에도 귓가에 멜로디가 저절로 맴돌 때까지. 그러다 아, 이제 비틀즈는 됐어, 하는 생각이 들면 대신 라디오를 조그맣게 켜놓는 거다. 낮에도, 밤에도, 요리를 하거나 청소할 때에도, 작은 소리가 늘 함께할 수 있도록. 비틀즈와 함께 낯선 곳에서, 그건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풀릴 수도 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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