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민박 12

12. 마법에 해피엔딩이 있던가

by 이븐클라우드

떠나는 날, 굳이 공항까지 나오시겠다는 부모님을 만류하고 혼자 집을 나섰다. 부모님도 많이 약해지셨구나. 문득 내가 돌아올 때까지 괜찮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시겠지 싶다가도 부모님은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니면 내색조차 안 하실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함께 얘기하고 밥 먹고 어딘가 다니고 그럴 날도 어쩌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릴지도 모르는데. 나는 젊어졌지만 부모님은 그대로. 내가 다시 얻은 젊음에 감사하며 그것을 써버리는 데 열중하는 동안 또 다른 현실은 또 그 나름대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이십 년을 다 쓰고 돌아오면 지금 내 나이부터의 이십 년은 어디로 흘러가버리고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십 년만큼 젊어졌지만 나만 젊어진 거다. 내가 기뻐하는 동안 분명히 그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있을 것이다.

마법의 규칙이 떠올랐다. 마법은 공정하다. 어떤 의미에서든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다. 무엇을 얻게 될지는 분명하지만 잃게 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기 때문에 선택의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마저도 그 대가로 바친 것 때문에 다시 어그러지고 뒤틀릴 수 있다. 동화의 결말이 어떠했던가. 마법이 등장하는 동화에 해피엔딩이 있었던가. 아무것도 모르고 선택한,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 그냥 우연히 빠져버린 아이의 경우는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면서 모든 게 해결된다. 하지만 나쁜 결과를 예상하면도 용기를 내어 선택 버튼을 누른 어른에게는 선택에 대한 잔인한 책임이 뒤따른다. 결국 ‘욕심내면 안 돼요, 현실의 행복을 소중히 여겨야 해요.’ 따위의 심술 맞은 교훈만을 남긴 채.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내내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길고 짧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덜컹덜컹 내려앉았다. 이게 잘하는 일인지, 행운인지 불운인지도 이젠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톨게이트를 지나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서 창문 저편으로 수평선이 가느다랗게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실처럼 드문드문, 수줍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바다. 예상했던 것보다 바다색이 더 맑고 밝아서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어쨌든 여기까지 온 거다. 이제 시작일 뿐이고 아직 잃을 것은 분명하지 않으니까 지레 겁먹지 말자. 걱정은 나중에, 일단은 수고했다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려주었다.


내가 머물 곳, 이름만 거창한 자칭 리버풀 민박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불도, 베개도, 그냥 내 여행용 가방뿐. 선뜻 앉을 만한 자리도 없어서 잠시 머뭇거리다 여행용 가방 위에 걸터앉았다. 이럴 수가 있나 싶게 조용했다. 베란다 밖으로 바다가 보였지만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시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만 편의점이 보이길래 물과 봉지빵, 방울토마토 한 팩을 사서 돌아왔다. 맨바닥에 앉아 허공을 보면서 토마토를 씹으니 차츰 마음이 침착해졌다. 빵까지 꼭꼭 씹어 먹은 후 가져온 수건을 빨아서 구석구석 걸레질을 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했다. 여행용 가방을 풀어 화장품도 일렬로 세워 놓고 그 옆에 손톱깎이와 귀이개도 가지런히 놓았다. 샌들과 슬리퍼를 현관에 놓고 옷을 모두 꺼내 구석에 개어두니 비로소 내 집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이 되니 5월인데도 집 안에 냉기가 감돌았다. 방바닥에 전기담요를 깔고 반팔 티셔츠부터 긴팔 티셔츠, 카디건까지 옷을 여러 겹 껴입은 뒤 청바지를 돌돌 말아 베개 삼고 점퍼와 코트를 이불처럼 덮었다. 사방이 조용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누워 있으니 등이 따뜻해지고 손도 따뜻해졌다. 이제 제대로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머나먼 리버풀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속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따뜻하고, 안전하고, 배고프지 않고, 일 안 해도 되고, 싫은데 억지로 해야 될 일도 없고, 게다도 바다가 바로 앞에 있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배어 나왔다. 좋구나, 정말. 미끄러지듯 스르륵 잠이 들었다.

keyword
이전 11화리버풀 민박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