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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an 25. 2022

리버풀 민박 4

4. 나는 젊어진 게 확실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는 순간, 재빨리 발등부터 확인했다. 여전히 선명한 샌들 자국이 보였다. 다행이다.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이 좀 부은 듯했지만 눈가 주름은 여전히 아주 짧고 얕았고 팔자 주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배꼽 근처 수술 자국도 없고, 어제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댔는데도 배에 탄력이 있다. 단지 앞머리 모양만 달라졌을 뿐이다. 오늘도 여전히 이십 년 전인 건가.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룻밤 꿈으로 끝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가.

  출근길에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박과장과 마주쳤다. 순간 긴장해서 온몸이 굳어버렸다. 숨을 훅 들이마신 채 저기서 걸어오는 박과장을 곁눈질로 살폈다. 뭐라고 얘기하지? 어제 왜 회사 앞에 서 있었냐고 설마 묻지는 않겠지? 뜻밖에도 박과장은 아주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이팀장! 나 어제 아침에 회사 앞에서 이팀장 봤잖아. 깜짝 놀랐네. 이팀장이랑 똑같은데 잘 보니까 이팀장이 아닌 거야. 이팀장의 이십 년 전? 아주 옛날의 이팀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젊은 여잔데 분위기가 똑같더라구. 근데 출근하고 보니 이팀장이 병가라는 거야. 엄청 아파서 결근이라고. 그럼 그 여잔 뭐지? 설마 도플 갱어인가 싶어서 혼자 심란했다구. 신나게 떠들어대는 박과장의 모습을 보니 차츰 마음이 진정되었다. 도플 갱어라뇨, 정말 놀라셨겠네요. 그치, 진짜 놀랐어. 근데 이팀장, 오늘 뭔가 분위기가 다른데? 어어, 그러고 보니 진짜 다르네. 어제 그 여자랑 비슷해. 뭔 일 있었어? 엄청 젊어 보이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반응이다. 박과장이 저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젊어진 게 맞나 보다. 나는 젊어진 거다.

  변함없이 전화를 받고 불만 사항을 처리하고 오늘의 콜 내역과 추이를 분석해서 제출하고, 하루는 전처럼 흘러갔지만 나는 달라진 게 맞다. 하루 종일 열 번도 넘게 ‘오늘 달라보이세요.’ ‘팀장님, 무슨 시술 받으셨어요? 뭔가 달라졌는데…….’, ‘어제 아프셨다더니 아닌가 봐요. 얼굴 엄청 좋아지셨는데.’ 같은 말을 들었다. 미묘한 차이일 수도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정도의 차이인 것도 맞다. 나는 정말 달라졌나 보다.

  안 입던 옷을 입고, 안 하던 액세서리를 하고, 안 하던 눈 화장을 하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요즘 무슨 일 있어? 확 달라졌네.’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듣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매일 아침 안도하고 감사하고 웃으면서 집을 나서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 스스로 젊어졌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게 되면서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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