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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an 23. 2022

리버풀 민박 2

2. 유리창에 젊은 내가 비쳤다

  지하철역을 우르르 빠져나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나도 덩달아 걸음이 빨라졌다. 뛰다시피 계단을 오르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다시 또 다른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사람들 틈에서 뒤처지지 않고 날렵하게 계단을 뛰어올랐다는 걸 깨달았다. 숨도 차지 않았고 멍하니 이리저리 치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젖히며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내 체력과 의욕이 이럴 리가 없는데. 다시금 내 얼굴을, 배를 만져보았다. 발목에도 힘을 주어보았다. 이렇게 단단한 느낌이라니. 정말 내가 20대로,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렇게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감쪽같이?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거든 진짜 몸이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 거든, 어쨌든 이건 흔한 일이 아니다. 바라지도 못하던,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서 지긋지긋한 전화나 받고 있어야 한다니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나. 다시 젊어진다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아득하지만, 한때는 간절히 바랬었다. 다시 젊어진다면 이것도 할 거고, 저것도 할 거고, 수많은 가능성들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던가. 근데 겨우 회사 앞 횡단보도에 이렇게 평소처럼 서 있다니. 그래, 오늘 이대로 출근할 수는 없다. 나름 성실한 직원이었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다. 앞으로도 쭉 성실한 직원, 할 수만 있다면 십 년 후에도 성실 직원일 예정이니까, 하루 정도야.

  부장님, 저 이현수 팀장인데요, 쿨럭,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쿨럭, 도저히 못 나갈 것 같아요. 죄송해요. 어떻게든, 어어, 나가보려 했는데, 꼴도 말이 아니고 목소리가, 쿨럭, 목소리가 잘 안 나와서요, 쿨럭. 무슨 일이야, 생전 아프지도 않던 사람이. 그러게요, 저도 속상하고, 쿨럭, 죄송해요.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 몸조리 잘해야지. 그럼 오늘 잘 쉬고 내일 보자고.

  종료 버튼을 누르고 돌아서는데 박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어떡하지?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박과장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결근하는 사람이 회사 앞에 있으면 안 되는데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나를 회사 앞에서 봤다고 부장한테 얘기하면 어쩌지? 당황해서 입을 반쯤 벌린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근데 뜻밖에도 박과장은 나를 못 본 것처럼 그대로 돌아서서 회사로 향했다. 그러다 건물 유리문 앞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몇 초간 가만히 바라보던 박과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회사로 들어가 버렸다. 나를 못 알아본 건가? 알아봤으면 뭐라도 말을 걸었을 텐데, 적어도 인사라도 했을 텐데. 혹시, 설마, 진짜 못 알아본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침 옷도 어제 막 택배로 받은 새 셔츠에 새 바지였다. 머리도 급하게 나오느라 대충 묶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한참 눈이 마주쳤는데, 뒤를 돌아 확인까지 했는데, 설마 그러고도 정말 못 알아본 걸까?      


  뒤돌아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박과장이 알아봤을까, 아니면 정말 못 알아본 걸까? 조금이라도 의아하게 생각했을까? 행여라도, 나와 신기할 정도로 닮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까? 건물 유리에 반사된 내 모습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은 나였지만 내가 아니었다. 젊은 여자가 거기 서있었다. 비슷해보여도 달랐다. 젊은 여자와 중년 여자의 차이는 엄마와 딸처럼 다르다. 아무리 엄마가 동안이고 딸이 노안이라도 속일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법이다. 생기와 피곤의 차이. 탄력과 늘어짐의 차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그런 정도의 간극이 벌어진 건 아닐까? 내 눈에만 잠시 그렇게 보인 게 아니라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거, 혹시 정말 그런 걸까? 기분 탓이 아니라 내가 정말 진짜 객관적으로 젊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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