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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an 24. 2022

리버풀 민박 3

3. 일단 앞머리부터 잘라볼까

  오전 9시 15분. 일단 눈에 띄는 카페로 들어갔다. 모닝세트를 시켜서 씹고 있자니 정말 20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피는 미지근하고 햄에그 샌드위치는 종잇장처럼 아무 맛도 없었지만 평일 오전에 회사가 아닌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하루, 어디에서 무얼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아침부터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다시 집에 가서 잠이나 잘까 하다가 무슨 소리, 오늘은 몸이 예전으로 돌아간 날인데, 단 하루의 행운일 수도 있는데 그냥 잠이나 자겠다고? 20대로 돌아간다면 꼭 해야지 싶었던 바로 그 일을 해야지. 그래. 근데 그게 뭐였을까? 뭐였지? 무얼 하고 싶었던 걸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나이 들어 버렸을까,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어, 뭐 그런 넋두리는 수도 없이 했으면서 막상 이런 순간이 닥치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청춘의 세계에서 너무 멀어졌다. 이십 년이나 흘렀고, 그 동안 많은 게 달라졌다. 나는 지금 20대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뭘 하든 그게 뭐고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대충이라도 흉내 내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이대로 지금 당장, 안 하던 걸 하는 건 곤란하다. 몸이 바뀐 것만으로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어색하고 뻣뻣하게 낯선 세계에 섞이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이런 변화가 오늘 하루일지도 모르는데 하루를 준비만 하다 보낼 순 없었다. 다른 건 천천히, 이 상태가 내일도 모레도 지속된다면 고민해보도록 하고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 나이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일, 이를 테면……. 아주 간단하게 앞머리부터 잘라볼까. 

  30대 이후로는 턱선까지 오는 머리 모양을 바꾼 적이 없었다. 나이 든 여자의 머리 모양 중에 최악이 뭔 줄 알아? 긴 생머리야. 거기에 청바지를 입으면 아, 딸이 대학생이구나 싶다니까. 언젠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며 친구가 얘기했었다. 딸이 왜? 딸 옷일 거란 얘기지. 미니 스커트, 퍼프 소매 블라우스, 팔랑거리는 꽃무늬 원피스나 핫팬츠에 컨버스화, 그런 거 걸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 아줌마, 아직 마음은 20댄가 본데 그래도 웬만하면 좀 자제하지 싶다니까. 뭐, 내키면 입을 수도 있는 거지, 스키니진인들 못 입을까. 야, 스키니라니, 그건 완전 호러다. 게다가 요즘 애들은 스키니 안 입어. 그렇게 킬킬거리며 웃다가 조금씩 규칙을 정하고 따르게 된 것 같다. 긴 생머리 금지, 앞머리 금지, 집 앞 슈퍼 외에 멀리 갈 때는 면티 금지, 청바지에 운동화 끌고 나가는 것도 금지, 물건을 잔뜩 쑤셔 넣은 백팩은 예전에 이미 금지, 치마도 무릎 언저리까진 와야 나이에 맞게 보이지. 에코백은 장바구니로나 쓰는 거고 출퇴근할 때는 그래도 각 잡힌 가방을 들어줘야지. 찰랑거리는 귀걸이는 이제 구석에 넣어두고 플라스틱 시계도 좀 버리고, 참이 달린 팔찌도 안녕, 캐릭터 티셔츠 안녕, 야구모자 안녕, 민소매도 안녕.


  앞머리를 자르고 일어섰다. 이마 주름을 가리거나 어떻게든 어려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일까봐 40대 이후로는 앞머리를 내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앞머리를 내린 얼굴을 보니 젊어서 그런지 확실히 자연스럽긴 하다. 그렇다고 예뻐 보였다는 뜻은 아니다. 미용실에서 한참 거울을 바라보는 동안 깨닫게 되었다. 분명히 나는 젊어졌지만, 젊은 시절의 나도 그닥 예쁜 편은 아니었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나도 모르게 예전의 내가 꽤 예뻤던 것처럼 왜곡된 기억을 저장했을 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남들은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할 거다. 혈색이 도는 뺨과 힘 있는 눈매가 언제부턴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늘어지고 선이 뭉개져 지쳐 보이게 되었을 뿐. 거꾸로 말하자면 40대의 내가 전날 밤 공들여 마사지를 받고 물을 많이 마시고 여덟 시간 이상 푹 자고 난 뒤 기분이 몹시 좋아서 근심 없이 웃는다면 그 표정이 곧 젊은 내 얼굴일 것이다. 꽤 좋은 유전자를 타고 난 데다 자기 관리도 수십 년 간 철저히 했다면 40대에도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을 정도의 얼굴이 내 20대 얼굴이랄까. 물론 그 정도도 기적이라는 걸 안다. 여덟 시간 푹 자는 일은 휴일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고 물을 2리터씩 마셔도 얼굴이 팅팅 붓기만 할 뿐 골고루 팽팽해지진 않는다. 뺨의 베개 자국은 출근길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근심 없이 활짝 웃을 수 있는 아침은 근 십 년 간 없었으니까.

  미용실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다. 눈에 보이는 가게마다 들어가 구경했다. 액세서리, 화장품, 옷, 구두, 핸드백, 눈에 보이는 대로 만져보고 몸에 대보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세 시간쯤 걸었는데도 어딘가 앉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허리에 힘이 빠지거나 어깨가 아래로 처지는 느낌도 없었다. 종아리가 뻣뻣해지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의 나는 걷는 걸 정말 좋아했었는데. 하루 종일 걷고도 다음날 또 걸을 수 있었고 며칠 못 걸으면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아침 일찍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곤 했었는데. 어느새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오늘의 나는 어제와 다르다. 배가 금방 고파지는 것도 놀라웠다. 최근 들어서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끼니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의식적으로 음식을 밀어 넣곤 했다. 근데 지금은 맹렬하게 배가 고파서 뭐든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항상 더부룩했던 아랫배도, 그러네, 지금은 정말 날씬하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문득 깨달았다. 오늘 ‘어머님’ 소리를 한 번도 안 들었다. 화장품 로드 숍이나 어린 애들이 많이 찾는 브랜드에서도 ‘누가 쓰실 건가요?’라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구경이나 하다 나가겠지 싶어 굳이 다가오지 않았던 점원들이 오늘은 직접 상품을 들어 권해주기까지 했다. 그 동안은 그렇지 않았다. 따님 거 찾으시는 건가요? 어머님 이건 이렇게 하는 거구요, 어머, 나이보다 젊어보이세요……. 원치 않아도 어느새 듣게 되는 말들. 새삼 내 나이와 외모를 실감하게 되고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대로 꾸역꾸역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말들. 저 어머님 아니거든요, 딸이 아니라 제가 쓸 거예요, 그런 말은 차마 못하고 아 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어쩌면 내 나이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척도가 아닐까, 어느새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진짜 젊다면 어디 가서 ‘어머, 젊어보이세요’ 같은 말은 안 들을 텐데. ‘어머님’ 대신 ‘고객님’이라는 말을 들을 텐데. 이러다 시간이 더 지나면 당연하다는 듯 ‘어르신’ 어쩌고 하며 예의를 갖춘답시고 말하겠지. 나는 그 말들이 다 싫은데. 왜 나이 든 여자는 자식이 없어도 어머님이 되나. 왜 나이 든 여자는 당연히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고, 레깅스나 티셔츠는 따님을 위해서 구매하는 거라고 여겨지나. 왜 나는 그 말들이 겨냥하는 중년 여성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게 부끄럽고 민망한가. 그래서 언제나 아 예, 하며 얼버무려 수긍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빠져나오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인테리어 소품이나 주방용품을 파는 매장이 아닌 곳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꼈었는데, 오늘은 20대들이 바글바글한 매장에서도 내가 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확실히, 이건 확실히, 의미심장한 반응이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졌다면 나는 분명히 달라진 거다.     


  한없이 들뜬 기분으로 밤늦게까지 거리를 돌아다니다 한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나서도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그리고 혹시라도 자고 일어나면 다 원점으로 돌아가 있을까봐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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