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가 올 때까지
꽃집에 가서 꽃을 고를 때 활짝 핀 꽃봉오리보다는 아직 피지 않는 꽃들을 골라 포장해달라고 한다. 왜냐면 곧 꽃이 만개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산책을 하다가도 꽃을 보면 활짝 핀 꽃보다는 아직 피기 전에 잔뜩 움츠린 꽃봉오리에 마음이 쓰인다.
"이 꽃봉오리도 곧 피어나겠구나"
꽃이 활짝 피어나기 전에는 꽃봉오리의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이라면 어떤 자세일까?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웅크린 자세는 바른 자세는 아니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의 감정상태를 표현해주는 하나의 자세이다. 이 자세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웅크린 자세를 보면 뭔가 답답하기도 하고 음침하기도 하고 부정적 기운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에게 필요한 시간이라면 기꺼이 기다려줘야 한다.
남자답게 어깨 좀 펴. 괜찮아
주눅들어 보이잖아. 당당하게 얼른 일어서
라는 말이 격려와 위로일 수 있겠지만 인위적으로 권하지는 말자. 엄마 뱃속에서 아기가 머물면서 취하는 태도도 웅크림의 자세이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을까 싶지만 만삭이 되어 출산일이 되면 아가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엄마 자궁을 통과하며 웅크림의 자세는 엄마의 자궁을 통과하는 동안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심각한 고민을 할 때 웅크리는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능력치보다 과부과된 짐이 있다면 반드시 웅크림의 시간이 오게 되어 있다. 차있는 물은 없는데 자꾸 내보내기만 한다면 언젠가 그 강은 말라버리고 만다. 내보내기를 멈추고 채우는 시간을 갖자. 과적된 짐을 내려놓거나 짐을 들 수 있는 근력을 키우는 시간을 갖자.
우리 모두에게 웅크리는 시기가 필요하다. 성미가 급한 사람은 웅크림의 자세가 달갑지 않기에 벌떡 일어나 다시 뛰려고 할 것이다. 웅크리려고 잠시 동안 멈춘 자신을 나무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웅크릴 때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급하고 초조한 마음을 불편한 감정으로 생각하고 구석으로 밀어놓고 만다. 시간낭비로 생각한다. 없애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웅크림 없이는 제대로 된 전진은 만무하다. 웅크림은 더 이상 후퇴가 아니다. 다시 몸을 펴고 똑바로 걷고 뛰기 위한 준비자세이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웅크림의 시간 당신에게도 필요하지 않은가?
웅크림의 시간이 필요한 다른 예가 있다. 주위로부터의 차단이 필요할 때이다. 환경으로부터 차단, 사람으로부터의 차단이다. 내 후배 중 한 명은 1년에 한두 번 정도 잠수를 탄다. 갑자기 연락두절상태가 되곤 하는데 처음에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제까지 연락되던 사람이 갑자기 소통불가 상태가 되면 온갖 생각이 스쳐가기 마련이다.
무슨 일 있나?
내가 실수했나?
상대방이 걱정되다가 나 자신을 괜히 반성했다가 혼란스럽다. 그 후배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이 후배는 가끔 힘들면 이렇게 혼자 동굴을 파는구나'라는 패턴이 파악되어 다시 돌아 오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가끔 자기만의 동굴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 있는다고 하여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소진된 기운이 채워지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만의 회복 방법이지 싶다. 땅으로 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가 왔구나'라는 신호라고 한다. 그 신호가 잡히면 앞뒤 안 가리고 자신의 존재 버튼을 꺼버리고 싶다고 한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주변 사람들이 걱정, 근거 없는 상상을 하지 않게끔 작은 표식하나 정도는 남기고 가면 어떨까.
잠시 휴식 중
잠수 중
여행 중
동굴 파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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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스타일로 흔적 하나는 남기고 다녀오도록 하자. 관계 피로감에 소진된 자신은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얘기 정도는 해주면 어때서'라는 서운함이 있다. 웅크림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기다려 주자. 다시 돌아온다면 띠 뜻한 미소 한 움큼으로 맞아주어도 좋겠다.
대화를 하다가 침묵의 시간이 있다면 웅크림의 시간으로 볼 수 있겠다.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침묵하는 이유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대화 주제가 단절되는 경우
상대방과의 관계가 불편한 경우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해석해주기를 바라는 경우
이전에 나눈 대화 주제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경우
자신이 느낌 감정에 대해 표현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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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침묵의 의미도 다양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51초 침묵'의 일화는 유명하다. 애리조나 주 총기난사사건으로 인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연설 중 최연소인 9세 희생자를 추모하며 51초간 침묵하는 모습이었다. 오바마의 진심을 보여준 51초의 침묵은 그가 했던 수많은 연설 중 최고의 연설이 되었다.
말로 인한 공해, 사람으로 인한 공해, 문자로 인한 공해 등은 우리들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침묵을 어색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하기보다는 침묵 또한 나를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에 침묵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필요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웅크림의 시간을 갖자. 자세를 잡아도 좋고 침묵의 시간으로도 좋다. 숨을 낮게 쉬고 호흡을 깊이 들이키고 내쉬며 넉넉히 시간을 가져도 좋다. 겨우 내 바짝 말라있던 나무가 숨죽이며 있다가 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때'가 왔음을 외친다. 온통 마른가지였던 가지에 새순이 달리고 꽃봉오리를 내놓는다. 삶이 고단한 당신이지만, 아무도 당신의 고단함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웅크림의 자세를 취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