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확인하는 시간
"나 여기 있어요"
재난 상황이 닥치면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래야 누군가 자신을 발견할 확률이 높고,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다 보면 적절한 타이밍에 다른 사람의 구조를 받는 것에 촌각을 다투게 되는데 구조를 위한 신호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재난영화에서 보면 연기를 피우거나 비행기에 발견되기 위해 몸짓을 사용하거나 깃발 신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반사경을 통한 빛 비춤 신호로 발신하거나 모래사장이나 눈밭에 SOS를 표기하여 구호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재난자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는 데 굳이 재난상황이 아닌 삶의 여정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은 중요한 이슈이다.
존재감[存在感]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람이나 사물이 실제로 있는 느낌을 말한다.
2009년 '아이리스'라는 드라마에서 김승우 배우가 맡았던 박철영의 연기 캐릭터를 계기로 '미친 존재감'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방송가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 용어는 큰 비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등장 자체만으로도 큰 이목을 집중받는 캐릭터를 뜻한다. 비슷한 용어로는 '시선강탈'정도 될듯하다.
사람들 중에는 존재감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존재한다. 남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감도 있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감도 있다. 사람마다. 존재감이 강한 사람은 많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지만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들의 병풍 역할을 한다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존재감을 구분해 놓았지만 과연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 존재할까?
존재감 없는 사람들은 없다. 재물, 권력,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선망하다 보니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부족한 사람, 뒤쳐진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 등으로 불릴 뿐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미나는 새 친구를 사귀어야 하지만 걱정이 많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쉽게 친구들에게 곁을 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친구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친한 친구를 사귀고 싶은 과한 욕구가 오히려 눈치를 보게 만드는 주 원인이다.
나를 제대로 알면 실망할 거야. 어떡하지?
이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친구와 관계를 맺다 보니 오랫동안 우정이 유지되는 경우가 드물다. 늘 분위기를 살피며 다른 친구들이 마음 상해할 짓을 하지 않기 위해 긴장하기 일쑤다. 이러한 지나친 조심성은 미나만의 독특한 매력을 앗아가고 이도 저도 아닌 공기 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미나는 친구들에게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면 실망할 거라는 비합리적인 사고가 미나를 자꾸만 움츠리게 한다.
진정한 존재감은 무엇일까? 내가 이 자리에 올곧게 서있음을 알리는 증거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인정일까? 다른 사람이 알아봐 주면 나의 존재감이 생기는 걸까?
미나의 어머니는 미나가 변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눈치 없으면 친구 못 사귄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한테 안 그러는데 너는 뭐가 그리 불만이니?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리 따져. 예민하게 굴지 마. 그냥 넘어가기도 해야 사람들이 좋아해
미나는 집에서조차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 안 되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고분고분하고, 고분고분해졌더니 활발해지라고 요구받고, 활발해지려 했더니 튄다면서 자제하라고 하였다. 존재감은 그냥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주는 것이 아닐까?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적에 부모 참여수업에 간 적이 있다. 교실 뒤편에 엄마들이 빙 둘러서서 저마다 본인의 자식만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나도 역시 내 아들 뒤통수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생님의 수업이 무르익고 손을 들고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별명에 관한 주제를 나누는 수업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아들의 별명을 '나무늘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워낙 동작이 느린 건 알고 있었지만 나무늘보라니.... 나무늘보를 상상해보니 썩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굼뜨길래 나무늘보래....
그동안 반 아이들이 놀렸던 건 아니었을까?
라는 별별 생각이 몰려왔다. 이 생각에 계속 사로잡혔다가는 아들의 별명을 이유로 아들에게 '좀 빠릿빠릿하게 행동할 순 없니?'라고 잔소리하는 엄마가 될 뻔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잔소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아들은 느리지만 결국 해내는 아이로 성장하고 있다. 느리고 또 느려서 나의 속도와는 맞지 않지만 자신만의 속도로 잘 살고 있다. 이러면 됐지 뭘 더 바랄까.
조용하면 조용한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그냥...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첫째 아들은 눈물 왕자다. 속상해도 울고, 서운해도 울고,,, 울고,, 울고,,,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 눈물부터 흘리곤 했다. 어릴 때야 봐줬지만 청소년이 되고 나서는 주변 엄마들이 한소리 했다.
이제 덩치도 산만해졌는데 저렇게 울게 놔둘 거예요?
덩치가 산만한 남자 청소년은 울면 안 되나? 헌법에라도 명시가 되어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구시대의 유물일까? 아들은 그 후로도 속상한 일이 있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말을 할 때는 자주 운다. 자주 운다고 핀잔을 주면 아이는 자신의 우는 모습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잘 표현되는 그날까지 조금 더 기다려 줘야 하는 아이일 뿐이다.
아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애쓴다. 집순이 스타일인데 일부러 나가서 활동하다가 탈진되고, 보이는 것 하나라도 취득하려고 동분서주한다. 다양한 경험을 쌓아 자신만의 스토리를 갖는 것도 좋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을 통해 얻어진 존재감은 진짜 존재감이 아니다. 증명서로 치면 언제라도 발행 취소가 될법한 존재 증명서인 것이다. 진정한 존재감은 자기로부터 나온다.
그냥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데... 그 자체로 존재감 있는 사람인데....
너무 애쓰지 말자.